러브오어피스
@삼번국도

불교 철학 입문.

작년 신설된 이 강의는 첫 번째로 강사가 모 유명 사찰의 승려라는 점에서, 두 번째로 대규모 강의인데도 절대평가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파격이었다. 두 번째의 경우 불교의 어떤 가르침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데 그건 학생들 알 바가 아니었다. 어쨌건 그들에게는 수강인원 스무 명 이상인 강의가 절대평가로 진행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했다.

 

그 해 한국 대 익명 커뮤니티에는 내내 ‘불철’(불교 철학 입문의 준말이다)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대학 강의의 생리를 잘 이해하진 못했지만, 자비심만은 끝내주는 강사 덕분이었다. 당시 휴학생이던 에녹 역시 귓결에 소문을 전해 듣고 복학하자마자 불철을 수강할 계획이었다. 학점과 강사의 보리심. 그것들은 에녹에게도 상당히 필요한 물건이었으니까. 비록 이름자부터가 세례명이고, 아직도 꼬박꼬박 성당을 다니며, 성당 청년 밴드의 자작곡을 줄줄 외우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기는 하지만.

 

아니지. 관점을 달리해보는 건 어떨까? 창과 방패가 꼭 부딪칠 필요는 없다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젊은 날에 일어날 수 있는 대부분의 전쟁은 피할 수 있다. 운 좋게도 에녹은 지금껏 그게 가능했다. 최에녹을 이루는 것은 대개 모순이다. 그 어떤 때보다 경쟁이 치열했던 수강 신청에 결국 성공해낸 날, 에녹은 보속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하나님, 이 정도는 봐주세요. 당신의 어린 양이 졸업을 하려면 별수 없었습니다. 학점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구부러질 일도 부러질 일도 없이 살아가기, 이것이야말로 최에녹이 체화한 가장 가치 있는 아포리즘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쭉.

 

그런 마음과 함께 에녹은 진동하는 핸드폰의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넓고 미끈한 이인용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이제 막 에녹의 접시에 샐러드를 덜어주는 참이었다. 사실 무엇보다도 이 상황 자체가 거대한 모순이었다. 우선 남자와 에녹이 어제까지만 해도 눈인사나 겨우 주고받는 관계였으며, 레스토랑에서 오붓하게 샐러드 나눠 먹을 사이는 아니었다는 것. 하다못해 저 남자, ‘한국대 조형예술대학 도예과 남신’이라 일컬어지는 남자의 얼굴이 어떤 명성을 가졌는지도 에녹은 잘 알았다.

 

별명의 조건: 어쨌든 인상적일 것. 그런 의미에서 ‘도예과 남신’은 성공적인 네이밍이다. 그 유치하면서도 직관적인 수식어가 최에녹의 뇌리에서 도무지 잊히지를 않았으니까. 아니 아예 그 별명이 대놓고 언급된 커뮤니티 글을 통째로 캡처해다 머릿속에 쑤셔 넣기라도 한 것처럼. 제목부터 댓글까지 하나하나 암송하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당장이라도 외울 수 있는 문장의 나열은 다음과 같았다.

 

이번학기 ㄹㅈㄷ)불교입문 수업 첫날부터 한국대 공식 커플 나옴

근데 하필 그 커플이 도예과 남신이랑 실음과 말티즈ㄷㄷ

 

댓글 (98)

익명 1

??

익명 2

실음과 말티즈가 누군데 씹덕아

ㅤ익명 3

ㅤ실음과에 네임드 하나 있음ㅇㅇ 얼굴로

익명 4

이거 도예 ㅂㄴㅇ 얘기 아님?ㄷㄷ도예과 남신vs실음과 말티즈 누가 더 잘생긴거냐

ㅤ익명 7

ㅤ갠취 말티즈

ㅤ익명 10

ㅤ이젠 vs가 아니라 ×인데 그게 뭐가 중요함 ㅋㅋ

ㅤ익명 11

ㅤ익10 이새끼가 ㄹㅇ 미친새끼

익명 5

헐 나 어제 예대친구가 술집뒷골목에서 고백하는거 봤댔는데ㄷㄷ;; 개구라인줄…진짜였냐

ㅤ익명 6

ㅤ그 얘기 자세히 좀 제발

ㅤ익명 12

ㅤ와 아웃팅 실화냐?ㅋㅋ한국대 미쳐돌아가네~얘들아 정신차려;; 쓰니도 글 내리고 좀;

익명 13

세례받은 학우들도 불교를 믿게 하다니 불철 진짜 가슴이 웅장해진다

(추천 개수 213개)

 

까지 회상한 실음과 말티즈는 난도질당한 로메인을 입에 넣고 느리게 씹었다. 불철 강의실 앞자리에서 그 게시글을 보며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던 에녹 옆에는, 불행하게도, 노아가 앉았다. 불교 철학 입문. 그것은 두 사람의 시간표에서 유일하게 겹치는 강의였다.

 

수업 내내 에녹은 뒷자리 학생들의 열렬한 시선을 등으로 느껴야만 했다. 심지어 어디서는 카메라 촬영음까지 들렸다. 그 사진의 초점이 두 사람을 향했을지 아니면 수업 피피티를 향했을지 에녹으로서는 영영 알 수 없을 일이었다. 노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수업을 듣는 내내 즐거워 보였으며, 끝나자마자 튀어 나가기 위해 짐을 싸던 에녹에게 ‘수업 끝나고 시간 돼요?’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노아, 단 두 글자로 저장된 상대방의 번호 열한자리를 보고 에녹은 육성으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에녹은 비명을 지르는 대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상황까지 다행인가?

 

느린 재즈가 깔린 레스토랑 구석에 콕 박혀 앉은 에녹은 포크를 빙글빙글 돌리며 노아를 들여다보았다. 고개만 들면 당장 눈에 들어오는 날카로운 턱선. 내리깐 눈동자의 은은한 빛깔. 테이블에 올라온 파스타를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는 손. 그것을 이루는 굴곡과 힘줄과 핏줄. 식기를 쥐느라 희게 질린 손톱의 단정하고 깔끔한 모양. 그러니까 과도 아니고 단과대 단위로 남신 소릴 듣는 남자가 지금 한리단길 데이트코스 맛집 한가운데서 나랑 밥을 먹고 있다고. 에녹은 접시 위에 올라온 샐러드를 포크로 쑤셨다. 이 사람이 오늘 별안간 왜 이러는가. 이건 도무지 모르겠다.

 

솔직해지자. 다행일 수도 있다고 최에녹은 느꼈다. 백노아가 ‘우리 사이를 도는 불쾌한 소문’에 대해 어떤 입장도 표명하지 않는 지금 이 상황이. 대신 한리단길 데이트 코스를 대표하는 맛집으로 데려와 점심을 사주기까지 하는 이 현상이. 생각이 아니라 느낌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 될 대로 되라지. 에녹은 맥없이 커뮤니티에 게시글 쓰는 상상이나 했다. 사랑하는 학우 여러분, 이 자리를 빌려 몇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1. 혹시 요즘 마음에 안 드는 동기에게 ‘네가 누구를 사랑하든 우리는 너를 지지한다’고 말하고 떠나는 신종 괴롭힘이 한국대에서 유행 중인가요? 2. 조형예술대학 쌉남신으로 불리는 남자가 갑자기 제게 밥 먹었냐는 질문은 왜 했을까요? 3. 자리에 앉자마자 혹시 에브리타임 보셨냐고 세 번쯤 질문했는데 다 못 들은 척하는 건 무슨 의도에서일까요? 마음속 질문지 사이로 노아의 문장이 끼어든다. 4. 혹시 못 먹는 거라도 있어요?

 

“아뇨, 아니, 네?”

“못 먹는 거 있냐구요. 영 먹지를 않길래.”

“아 아니요 그냥……. 뭐라고 해야 할까, 저한테는 이런 상황 자체가 조금.”

“조금?”

“익숙하지가…않아서.”

“아아…. 난 또.”

 

걱정했잖아요. 다정하고 가벼운 타박과 함께 노아가 사랑스러운 무엇을 관찰하듯이 에녹과 눈을 마주쳤다. 이제 곧 대학도 졸업할 나이에 그런 시선을 받기란 에녹으로서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에녹과 대화하는 노아의 목소리는 다감했고 짐짓 발랄하기까지 했다. 한국대를 강타한 이 해프닝의 진상을 규명해달라는 요구에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노아가 앞으로 익숙해지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조언해주었을 때, 에녹은 손을 떨다가 애꿏은 포크만 한 번 떨어뜨렸다.

 

다시 말하지만, 최에녹을 이루는 것은 대개 모순이다.

電子工學 네 글자 자수가 박힌 과잠을 입고 악보를 베껴 쓰던 편입 준비 시절부터 그 역사는 시작되었다. 책장에 성경이 여러 권 꽂힌 집에서 에어팟 끼고 너바나 듣기. 와중에 핸드폰은 갤럭시 쓰기. 밥 먹을 땐 성호 긋고 교양 수업에서는 합장하기. 전자공학과 실용음악, 〈주는 우리의 기쁨〉과 〈하이웨이 투 헬〉, 성경과 불경, 마침내 백노아와……글쎄.

 

이 남자가 올라간 저 쟁반 저울의 다른 한쪽엔 뭘 놓아야 하나. 뭐가 놓이게 될까. 내가 가진 것 중 무엇이. 의문하며 동시에 최에녹은 처음으로 근거 없이 직감했다. 벌어질 것이다. 무엇이? 전쟁, 영적 전쟁이. 주님, 이 어린 양을 보호하소서.

 

그러나 자애로운 주님의 음성은 들리지를 않고 귓가에는 그저 사랑 노래만이 윙윙 맴돌 따름이었고.

 

 

LOVE/PEACE

 

 

근데 백노아 과 씨씨 전적 있다며. 언젠가 에녹의 심장께를 스치고 지나갔던 댓글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캐물을 기회도 없이 연인과는 이미 헤어진 뒤였다.

 

연인.

비록 반지를 나눠 가진 적은 없지만, 디데이 앱을 설치한 적도 없지만, 심지어는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노아와 에녹은 이제 막 한 달째에 접어드는 풋풋한 연인 사이가 됐다. 화요일에 하나뿐인 교양 수업을 들은 뒤에는 늘 함께 밥을 먹고 산책한 뒤 각자 갈 길을 갔다. 이 루틴이 곧 두 사람의 일정이었다.

 

부담스럽던 첫인상과 다르게 노아는 애인이기 이전에 괜찮은 말동무였고, 에녹과 화제가 잘 맞았다. 집 근처에서 헤어지고 나면 새벽까지 통화했다. 전자음 섞인 목소리조차 다정하게 느껴질 때면 에녹은 차라리 착각하고 싶었다. 아니 사실 자주 그랬다. 친구와의 선약 때문에 먼저 가봐야겠다는 통보 앞에서 서운해하는 표정과 마주칠 때, 밤새고 나왔다는 말에 한숨 자라며 어깨를 내어줄 때, 그 자세로 카페 구석에서 두 시간 동안 꿈쩍도 안 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때, 신통하게도 좋아하는 록밴드가 겹칠 때.

나 사실 하드 메탈도 자주 듣는 편이거든요. 노아의 고백에 에녹은 한리단길 중간에 서서 기립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클래식만 들으며 살 것 같은 얼굴로 어떻게 잘도 여기까지 오셨군요. 대충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데이트는 대개 한국대 후문으로 접어들며 끝이 났다. 예대는 캠퍼스 단위로 한 데 묶여 서로 가까웠지만 에녹은 학기 동안 따로 대여하는 연습실이 있었고, 노아는 과실에서 진행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에녹의 스튜디오에도 가보고 싶은데 졸업 작품 계획만 해도 너무 바쁘더라고요.”

 

후문을 등지고 고백하듯이 말하던 ‘도예과 남신’은 처음으로 피곤한 대학생처럼 보였다. 최소 4분 길이의 자작곡 다섯 개를 발표해야 졸업이 가능한 에녹도 그 심정을 모르지 않아 희미하게나마 유쾌해졌다.

 

“굳이 올 필요 없어요…. 딱히 꾸며놓지도 않아서.”

“작곡하는 에녹도 한 번쯤 봐두고 싶어서. 안 돼요?”

“……그…딱히 오는 사람 막을 정도는 아니긴 한데…노아가 굳이 와보고 싶다고 하면 안 말릴 거긴 한데요.”

“그럼, 시간 날 때 가도 되는 거죠?”

“네, 넵. 넵넵.”

 

결론적으로 노아와의 데이트는 늘 즐거웠지만 동시에 언제고 무의의했다. 왜냐면, 애당초 이런 건 그냥……놀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노아에게도 나에게도. 각자 맡은 바 역할을 다할 뿐인 소꿉놀이 아니냐고. 이렇게 내내 함께 다니고는 있지만, 그래도 상대가 그 백노아니까. 학우들이 무얼 얼마나 떠드는지 말해줘도 신경도 안 쓰고, 아직도 커뮤니티에 번번이 ‘그분 애인 있나요’ 따위의 질문이 올라오는.

 

그런 천하의 백노아래도 처음으로 손을 잡았던 날에는, 글쎄, 정말 무슨 연애라도 하는 듯이 굴었지만……. 거기다 대고 아무 말 안 한 나도 나지만.

 

그야 까놓고 말해서 누가 그런 사람이랑 사귀기를 거부하겠냐고. 드라마 주인공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그날은 산책하는 내내 저항 없이 손을 잡고 다녔다. 찰흙 만지는 손 치고 노아의 손은 부드럽고 말쑥한 편에 속한다. 에녹에게는 나름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그때 백노아도 정말로……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그게 만약 어떤 전조라면.

 

그럼, 우리가 여태 해온 그거, 혹시 정말로 연애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나?

 

익명 57

개강총회에서 뭘 하면 씨씨가 생김? 내 기억 속 개총은 술에 쩔은 좀비만 생기던 모임이었는데

 

아니 내 말이. 중얼거리며 에녹은 게임용 의자에 몸을 거의 파묻은 자세로 핸드폰을 켰다. 이제 학교 커뮤니티에 노아와 에녹의 이야기가 올라오는 빈도수는 적어졌다. 올라오더래도 ‘불철커플 수업 중에 필담으로 연애하는 건 좀 자제해주시길…’ 정도였는데, 이에 대해 에녹은 할 말이 많았다. 수업을 듣다 말고 깜빡 졸아서 옆에 앉은 노아의 필기를 베낀 것뿐이었으니까. 그 외에는 비밀 게시판 등지에 ‘얘들아 우리 명문대라는 자부심에 걸맞게 행동하자ㅎㅎ….’ 와 같은 글이 몇 개 올라와서 그런지 대체로 자중하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이번학기 ㄹㅈㄷ〉로 시작하는 그 글이었다. 사실 언제나 그 글이 문제였다. 흐름을 타 은근슬쩍 올라왔던 〈한국대 ‘그 씨씨’ 사귄다는 증거(사진 첨부.jpg)〉나 〈어쩐지 ㅂㄴㅇ가 ㅊㅇㄴ 바라보는 눈길이 아련하더라니ㅋㅋ〉 같은 글들은 역풍을 맞고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발단이 되는 그 글만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다. 에녹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친구라곤 하나 있는 놈마저 종일 백노아♥최에녹 염문설 캐고 다니기 바빴으므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최에녹 그거 아냐? 이 글에 지금까지 댓글 달리고 있더라./하나도 안 궁금했는데 고마워 영준아!!/천만에ㅋㅋ) 글쓴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정신력에 에녹은 내심 감탄했다. 나는 내 이름 검색하는 것만으로 손이 다 떨리는데.

 

개강총회에서 뭘 하면…. 그것은 에녹에게도 난제였으나 누구도 그 질문에 명확한 대답은 주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면 연락해라,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다, 사랑한다 좋아한다 온갖 간지러운 말은 쉽게 하던 백노아조차 개강총회 네 글자 앞에선 입을 꾹 다물었다. 시기상 맞춰보자면 분명히 개강총회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기는 했을 텐데 단서가 없었다.

 

에녹이 모니터에 작곡 프로그램을 띄워놓고 핸드폰 스크롤만 주야장천 내리는 사이, 상단 바에 문장 하나가 떴다가 사라졌다. ‘근데 너 크리스천이라고 하지 않았어…?’ 이렇다 할 친한 무리 없이 친구 하나만 달고 사는 에녹을 잘 챙겨주던 과대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쾌활한 성정으로 두루두루 친한데다 늘 웃는 상으로……잠깐.

 

얘랑 마지막으로 대화한 게 언제더라. 의문과 함께 과대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개강총회 네 글자가 자연스레 딸려 나왔다. 모이기로 한 술집 입구에 서서 인원 체크를 하던 얼굴.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최에녹 왔어, 하고 보고하던 목소리. ‘나는 남아서 취한 애들 돌려보내야지.’라고 말하며 한사코 술잔을 거부하던 그 웃음. 그러니까, 어쩌면. 에녹은 하릴없이 스크롤만 내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문자 메시지 목록을 켰다.

 

-

 

계획된 편입, 계획된 휴학, 계획된 복학. 부딪치게 되어 있는 창과 방패를 붙잡으려면 그만한 힘이 필요하다. 에녹이라고 언제나 모순을 매끈하고 말끔히 피해온 것만은 아니다. 젊은 날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전쟁을 피하고자 육신 전체가 백조의 다리라도 된 양 뛰어왔다. 대신 그 덕분에 지금까지의 대학생활은 탄탄대로 위를 달릴 수 있었다. 비록 교수가 과제곡에다 대고 ‘얼터너티브 록? 나쁘진 않은데 이젠 한물가지 않았나 싶네요. 뭐 에녹 군이 좋다면 그대로 가도 되긴 하는데.’라고 코멘트했을 때는 조금 무너지는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성악 하는 목소리와 악기 조율하는 소리의 아름다운 불협화음이 까랑까랑하니 캠퍼스에 울려 퍼지는 참이었다. 방음벽을 둘러쳐도 완벽한 고요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 마음도 이렇게 싱숭생숭한가. 교정 벤치에 드러눕듯 기대앉은 에녹이 청승맞게 중얼거렸다. 대중음악사 2 수업이 끝나자마자 광합성 하는 중이었다. 봄꽃도 다 지고 슬슬 환절을 준비하는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맑기만 했다.

 

이제 곧 졸업 학년이라고 수업의 대부분은 조별 과제 하나 없이 순탄하게 흘러갔다. 삼 학년 때부터 미리 준비해두었던 졸업 곡 작곡도 무난하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문제는 또다시 백노아였다. 아니 정말이지 요즈음 최에녹 가는 길에 걸리는 돌부리라곤 백노아 뿐이었다. 이러다가는 삶의 구심점마저 뺏길 성싶었다.

 

혹시 기억 못 해?

대중음악사 수업에 들어가기 전, 짐짓 쾌활하게 다가온 에녹을 향해 과대는 그렇게 되물었다. 너 개강총회와 관련된 걸 정말 하나도 기억 못 하냐고. 그럼, 그때 음대와 미대가 예산을 합쳐 같은 술집에서 모인 건? 너랑 백노아가 우연히 옆자리였던 건? 술잔을 넘어뜨렸던 거라든가…그러다 소위 ‘담배 타임’에 나가는 노아를 따라나섰던 건……. 그즈음 해서 에녹은 서둘러 과대의 말을 중간에 자를 수밖에 없었다.

 

“기, 기억나. 응! 내…내가 그러기는 했지. 아하하. 많이 놀랐겠다.”

“뭐, 좀 놀라긴 했지? 평소의 에녹은 조용한 편이니까.”

 

끊기다 못해 불탄 필름이 남의 말 몇 마디로 복원될 리는 없었으나 그 이상 들었다간 죽고 싶어질 것 같았다. 진짜 미안, 하고 고개 숙이는 에녹에게 과대는 손사래 쳐가며 웃었다. 아니 나한테 미안할 건 없지.

 

“그러다가 백노아가 너를 데려다주기까지 했으니 내가 한 건 실질적으론 별로 없고.”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당시엔 뭘까…싶었는데, 그러고 나서 둘이 사귄다는 얘기가 쫙 퍼졌길래…. 아 그래서였구나, 싶다가도 사람들 참 무례하구나 싶기도 하고.”

“…걱정해줘서 고마워.”

“어 사실 걱정했어 그동안. 영준이는 너 괜찮아 보인다고 했지만…당사자 마음이 어떨지는 모르는 거니까…. 에녹, 괜찮은 거 맞지?”

“으, 응…….”

 

아니 안 괜찮아. 지금 약간 비상 상태야. 멍하니 앉아만 있느라 오래간만에 인터넷 디톡스의 상태에 접어든 에녹이 읊조렸다. 그러니까 내가 백노아 옆에서 술도 쏟고 강냉이도 엎지르고 술 게임 하다 말고 어깨도 막 때렸다고? 그러다가 담배 타임에까지 따라 나갔다고. 과대가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이쯤 와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혹시 너무 술주정을 부린 나머지 복수를 당하는 중인가.

 

영준이 들었다면 혹시 술 마시고 한 생각이냐고 물었을만한 발상이다. 하지만 이거 아니면 무슨 이유가 더 있을 수 있는데? 내가 백노아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때까지 잘해준 다음, 결단의 순간에 처참하게 내치려는 거지……. 아니, 그래도 누가 주정 좀 부린 것 갖고 그렇게까지 하는데. (하지만…만약 그럴만한 술주정이었다면? 에녹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 자신을 위해.) 하여튼 백노아 대체 왜 그러는 걸까. 에녹은 벤치에 거의 눕다시피 늘어졌던 자세를 고쳐 정좌했다. 미대 건물로부터 학생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던 때문이었다. 저것 봐, 나오는 사람만 갖고 세도 여 7 남 3 견적이 뽑히는 절망적인 성비의 미대에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아무에게나 웃어주고. 그래도 새벽까지 문자 하는 건 나뿐이라고 하고. 그러면서 동기들에게도 막 여지 주고.

지금도 저렇게, 막 웃어주고……. 어라.

 

저것 보라며 삿대질하려던 에녹의 손이 벤치에 툭 얹혔다. 무언갈 말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익숙한 흰 얼굴이 미대 건물 입구에 선 채 맑게 웃고 있어서. 그런데 그게 저를 향한 게 아니라서. 옆에 선 사람과 어깨를 맞대고 무언갈 속삭이고 있어서. 노아의 이름을 부를까, 핸드폰을 킬까, 하다가 에녹은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멍하니 벤치에 앉아 학교 건물 뒤편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등을 들여다보았다.

 

진짜로 괜찮지 않아. 나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장난, 유희, 역할 놀이, 소꿉놀이. 서럽도록 가벼운 단어들이 심장께를 빙빙 맴돌았다. 그걸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상태로 노아가 복수하려 든다면, 당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나는.

 

-

 

“……그렇게 생각하니까 엄청나게 억울해져서…….”

“뭐가 억울한 건지 모르겠지만……전화 너머로까지 술 냄새가 진동하던데요, 에녹.”

“왜! 아니꼬와?!”

 

아니꼽진 않고 웃기기는 하다, 고 대꾸하려다 말고 노아는 말을 삼켰다. 대학가 포차 한 구석에서 자작자음을 하다 발견된 최에녹의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으므로. 와중에 꾸준히 빈 병을 치웠는지 테이블 위는 깔끔했다. 깔끔해서 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개강 총회에서 봤던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 몇 병 못 마셨겠지만. 도예과답지 않게 새하얀 로우탑 스니커즈가 테이블 주변을 맴돌다 멈추었다.

 

“나는 게이라고 소문이 다 났는데! 한국대 백오십만 제곱미터 안팎으로!”

“미안하지만, 나도 같이 소문 난 당사자인데요.”

 

말티즈라더니 진짜로 개가 되어버린 이 남자를 어찌 잡음 없이 데려간다……. 고뇌하며, 노아는 자연스레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았다. 카톡도 문자도 안 보고 씹어넘긴 애인에게 아득바득 전화를 걸었더니 웬 남자가 받고, 그 남자가 마침 잘 됐다며 주소지만 줄줄 읊고 전화를 끊어버린데다, 술에 취해 뭉개진 발음을 좇아 겨우 찾아온 술집이 싸구려 포차인 백노아라고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에녹 역시 노아의 기분을 살펴줄 상태가 아니었다.

 

“같이 마시던 사람은 누구였어요?”

“친구요. 과 동기……왜요, 못 미더워요?”

“에녹 친구라는데 내가 왜 못 미더워하겠어요.”

 

아아 그러시겠지. 툭 내뱉는 목소리나 째려보는 눈길이나 전에 없이 사나워 생경했다. 이 사람,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마음 한 켠이 차라리 유쾌해졌다. 뭐라고 하는지 한 번 들어나 볼까.

 

“봐, 평소부터 이렇게 방임주의니까 뭐 책임……책임질 생각도 않고…사람이….”

“뭐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뭐.”

“통화하면서 말한 알렉산더군은 또 누구예요?”

 

너 그것 참 잘 물어봤다, 는 듯이 에녹이 테이블에 눕혔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 사이 두 사람을 힐끗대는 시선이 여기저기서 오갔다. 큰 소리로 서러워하는 실음과 말티즈와 그런 그를 찾아온 도예과 남신. 누가 봐도 그 일대 최고의 안줏거리. 아직 남의 일에 관심 가질 수 있을만큼 제정신인 몇몇은 벌써부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저거 백노아 맞지, 하고 누군가 중얼였다.

 

“알렉산더 막시모프 니콜라이라고 부르세요. 알렉산더군은 저만의 애칭이라고요. 지금 이 자리엔 없지만, 스튜디오에서 기타줄 버젓이 뜬 채로 날 기다리고 있을…….”

“아, 그러니까 에녹이 기타에 지어준 이름이—”

“그래! 이래서 사람 따윌 사랑하는 게 아니었어! 어디서 다른 여자나 사귀어오고!!”

 

이게 진짜 무슨 소리지? 중얼이는 노아의 목소리 뒤로 헙, 하고 숨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또 한 차례 한국 대학교를 뒤흔들 가십거리가 지금쯤 몇몇의 손끝에서 적혀내려가고 있으리라. (에녹에겐) 불행하게도, 노아는 도예과 강동원 정우성 차은우…따위로 살며 구설수에 오르내리기에 이골이 났다. 이골이 나다못해 곧 무소음의 상태로 치환되었다. 그러고 나면 커다란 글자와 시끄러운 음악이 난무하는 대학가 실내 포차에서 유의미한 건 딱 둘 뿐. 노아 본인과…최에녹.

 

“에녹.”

“왜요…….”

 

에녹과 있으면 가끔 세상에 우리 둘만 남겨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노아는 그 문장을 소리내어 발음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술 기운 없이 말끔한 정신으로 포차 한가운데서 말할만한 내용은 아니지. 그러므로 또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최에녹이 된다. 웅얼대는 에녹을 두고, 노아는 눈을 굴렸다. 차라리 말해줄까. 홧김에…. 사귀어줄 거냐는 질문에 그러마고 다짐하고 말았던 것처럼. 에녹이라면 연막 상대로 그럭저럭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그런데 연애 상대로도 나쁘지 않길래 아직까지 이러고 있다고. 한 눈 팔 셈이었으면 애초부터 시작도 안 했을 거라고. 그러나 백노아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둘 사이로는 내도록 요란한 사랑 노래가 웅웅 울릴 따름이었다.

 

결국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노아였다.

 

“이만 가요, 데려다 줄게. 더 있다간 에녹 입이 다 삐뚤어지겠어요.”

 

그 소리에 에녹도 순순히 일어나 노아에게 안기듯 기댔다. 확실히 술에 강한 편은 아닌지 나간 돈이 많지 않았다. 먼저 나간 동기가 제 몫의 대금을 치르고 가서 그럴 수도 있고. 대금을 치르는 내내 에녹은 노아의 어깨에 기대 끙끙 앓았다. 벌써 숙취라도 찾아오는 모양이지.

 

“알렉산더군…….”

“…나랑 있으면서 외간 악기 이름 부르지 말아줄래요? 남들이 오해해요.”

 

어둠도, 기억도, 마음조차도 어슴푸레한 밤.

원색 유화물감을 완성된 그림에 덧바른 듯 사위마다 온갖 네온사인이 번뜩이는 거리. 발 디디는 곳마다 비지比地인 듯한 낯선 감각. 이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순진한 애인은 느리게 잠들어가는 저녁. 저렇게 생겼으면 세상에 고민할 일 하나도 없겠다, 고 혹자는 백노아를 두고 그렇게 경탄했으나 정작 그는 지금 한리단길 포차 거리의 그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번민하는 중이었다. 번민. 그렇다면 후회는? 후회는 했을까? 이 고생을 하느니 모르는 사이로 지낼걸 싶을까?

 

“알렉산더군에게서 한눈을 판 대가가 이렇게 쓰라리다니…….”

“그러니까 남들 듣기에 오해할만한 언사는 그만 두라니까.”

 

모를 일이다. 최에녹으로서는 영영.

 

-

 

우리학교 짱게(이)커플 헤어짐? ㄹㅇ?

ㅠㅠ

 

댓글(5)

익명1

오히려 이 정도면 오래 갔다

익명2

아 남의 연애사정 그만 좀 궁금해해;;; 밥 먹고 할 일 그렇게 없나

익명3

ㄴㄴ

익명3

아직 사귐~

ㅤ익명4

ㅤ??ㄷㄷ본인 등판?

 

일어나보니 세상은 몇 도쯤 더 기온이 올라가 있었다. 여름이 시작될 거라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술에 깨었을 때 에녹은 고통, 두 글자를 처음으로 읊조렸다. 고통. dukkha. 그것은 불교 철학 입문 첫날에 가르침 받은 개념이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모든 존재가 원하지 않는 모든 괴로운 경험을 통틀어 둑카라 정의한다고 했다. 이것을 직시해야만 비로소 그것에게서 벗어날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영 모를 말이었다. 고통, 그것을 직시해서 무엇하겠는가. 에녹이 겪은 세상은 그렇게 빡빡하지 않았다. 창과 방패의 싸움쯤은 피해 가려면 언제든 피해 갈 수 있었다. 뭐 근데.

그건 지금까지 그랬다는 소리고.

 

일어나자마자 에브리타임부터 들어간 최에녹은 둑카의 체현을 감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 부처님. 또다시 그는 학교 커뮤니티에 장문의 글을 올리는 상상을 했다. 사랑하는 학우 여러분, 이 자리를 빌려 몇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1. 멋대로 서동요 지어서 두 사람 사귄다고 돌림 노래를 부를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발뺌인가요? 2. 우리더러 아직 사귀는 사이라고 당당히 확언하는 익명 3은 대체 누구인 걸까요? 3. 도예과 쌉남신께서는 이 상황을 알고 계실까요? 뇌 내 성명문에 3번까지 적고 나자 핸드폰에 알림이 떴다. 백노아에게서 온 카톡이었다.

 

나 지금 에녹네 집에 가는 중인데 괜찮을까요?

어제 술 많이 마신 것 같길래

컨디션 괜찮을까 싶어서요

 

연달아 온 세 줄의 카톡을 멍하니 보다가 에녹은 괜찮아요, 네 글자만 적어 보내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마음 언저리에 ‘오히려 이 정도면 오래 갔다’ 한 줄이 오래도록 둥둥 떠다녔다. 진짜 억울한 건, 에녹으로서는 그 문장에 반박할 길이 없다는 거였다. 지금 우리 둘이 사귀는 게 맞긴 하는지, 아니라면 손은 왜 잡았고 키스는 왜 했는지, 순간마다 진심이기는 했는지, 아니 진심이 아니면 지금 왜 내 자취방에 찾아와주는지, 나 혼자 휘둘리는 중인지 지금까지…무엇 하나 물어볼 자신이 없었다.

 

현관문을 열어주는 제 낯빛을 보고 어이구, 하고 작게 탄식하는 노아의 목소리가 숫제 다정해 에녹은 차라리 울고 싶어졌다. 일전에 와본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는지 방안에 들어와 식탁에 기대선 노아는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편안해? 나는 이렇게 골 아픈데.

 

“혹시 이제껏 누워 있었어요? 에녹, 역시 어제 무리한 거 맞다니까.”

“무리는요….”

“이참에 말해봐요. 뭐 때문에 그렇게 마시고 뻗어 있었어요? 전화 걸기 전까지는 아무런 연락도 안 받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걱정? 정말 걱정한 거 맞아? 오늘 에브리타임에 우리 헤어진 거냐는 글이 올라왔는데? 그야 헛소문일 수도 있지만. 우릴 먼발치에서 보고 되는 대로 떠들기만 하는 글일 수도 있지만. 우리 사이라는 것부터가 애초에, 처음부터, 그런 커뮤니티 글 하나 때문에 시작한 관계였잖아. 그럼 같은 걸로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

 

“우리가…무슨 사이인가 싶어서요.”

“네?”

“남들 떠드는 소리만 무성하고, 정작 우리끼리 이게 연애인지 아닌지는 이야기한 적도 없고…그렇잖아요. (이즈음에서 노아는 천천히 팔짱을 끼고 에녹을 보기 시작했으나, 에녹은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사귄 적 없다고 해도 할 말 없잖아요. 지금 상태라는 게…….”

“그렇네요.”

 

네? 망연히 되묻는 목소리와 동시에 마주치는 시선. 에녹은 상대방의 표정에서 문득 기시감을 느꼈는데, 언젠가 과대가 저를 보던 시선과 노아의 그것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너 지금 기억을 못 한다 이거지?)

 

“말마따나 사귄 적도 없는 거 아니냐고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노아가 한 말 그대로 한 것뿐인데요?”

 

눈을 크게 뜬 채 반문하는 노아의 표정이 지나치게 무구하고 말끔한 형상이라, 에녹이 먼저 거실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저 남자가 저걸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할 말이 없어진 자리엔 감정만이 들어찼다. 퍼즐의 가운데 피스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설운 심정이었다. 내가…내가 뭐 어쨌다고. 나는 우리가 꽤 친하다고 느껴왔는데. 아니, 친구라고 믿었는데. 그 엷은 중얼거림에 노아가 뻔뻔스레 답장했다. 나도 우리 정도면 친구 사이라고 생각해요. 지나치게 사세고연한 태도라 에녹은 이 껄끄러운 분위기 가운데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돼…됐어요. 인싸들은 다 이런 거지…….”

“예?”

“나랑 사귀는 게 싫었으면 싫다고 말을 하지 이렇게 사람을…”

 

에녹이 훌쩍이는 동안 노아는 설움에 북받쳐 어물대는 애인을 가만히 보았다. 그가 무얼 말하고 싶어 하는지는 얼굴에 명료하게 드러나 있었다. 혹시 나 모르는 사이에 소주 한 병 꽂고 왔나. 애석하게도 에녹은 그걸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침착한 상태가 아니었다.

 

“…몰아세우고 그래요, 왜?”

“궁금해서 그러죠. 그동안, 이 주제로는 우리가 대화를 한 번도 안 했잖아요.”

“몰라!! 난 순수하게 좋았는데…. 재밌었고. 그래서 그냥, 받아들이려고 한 것뿐인데…. 내 의견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귀는 사이가 됐다지만….”

“…그럼, 지금 에녹의 의견과 전혀 상관없이 헤어지게 된다면요? 그것도 받아들일 거예요?”

 

피하지 말고 말해보라고. 저울질하지 말고 지금 당장 하나를 가져가라고. 양립 없이 하나를 고르라면 당신은 무엇을 가져가겠습니까. 그 짤막한 질문마저 에녹을 따끔따끔 아프게 만들었다. 일전에도 그런 강요는 받아본 일이 없거니와 이후로도 드물 터였다. 조용히 입 다물고 구석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하다면 누구도 양자택일을 강요하지 않으니까.

 

“아, 아니……그러니까 나는…….”

“말마따나 에녹 혼자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어영부영 상처 입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마주한 시선이 웬일로 흔들리지 않았다. 노아는 팔짱을 푼 채 아이 어르듯 다정한 시선으로 에녹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심판을 기다리는 양순한 눈빛으로. 그제야 어쩌면 흔들리기에는 너무 멀리 왔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깨달음이 에녹의 뇌리를 두드렸다. 이제 와 이 모든 것을 소꿉놀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늦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애초부터.

 

“지금 이 결정만은 에녹이 직접 해야 하지 않겠어요?”

“…….”

 

저 남자와 사랑을 하든가

홀로 평화롭고 말든가.

 

백노아는 무균실에 들어온 흙발의 타인이고 바야흐로 이 사랑은 전쟁이다. 평화의 옆자리에는 도무지 앉아주지 않는다. 종일 비틀거리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아플 것이다. 에녹이 알던 세상과는 화해의 여지 없이 영영 이별하게 될 수도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 남자가, 백노아가 그렇게 만들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

 

그렇대도 당장 이 순간만은. 에녹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나, 나랑.”

“네.”

“사……사귀어주지 않으면, (울음기 섞인 훌쩍임) 한국대 정문에다 대자보 붙일 거예요!”

“네…. 음, 네?”

“나랑 안 사귀어주면 한국 대학교 조형예술대학 도예과 백노아는 구제가 불능한 천하의 카사노바 새끼라고 한리단길부터 에브리타임까지 온 사방에다 대자보 써 붙일 거라고…….”

“하하….”

“왜, 왜 웃어요…나는 이렇게 진지한데….”

“나도 진지해요, 에녹. 진지하게….”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여태 최에녹을 이루던 것은 거개가 모순이었다.

電子工學 네 글자 자수가 박힌 과잠을 입고 악보를 베껴 쓰던 편입 준비 시절부터 그 역사는 시작되었다. 책장에 성경이 여러 권 꽂힌 집에서 에어팟 끼고 너바나 듣기. 와중에 핸드폰은 갤럭시 쓰기. 밥 먹을 땐 성호 긋고 교양 수업에서는 합장하기. 전자공학과 실용음악, 〈주는 우리의 기쁨〉과 〈하이웨이 투 헬〉, 성경과 불경, 마침내 백노아와 백노아를 만나기 이전까지의 삶. 손을 맞잡은 뒤에야 에녹은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날 만큼 긴장한 상태였음을 자각했다. 만져지는 것이 온통 축축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운명에 등 떠밀려 말릴 새도 없이 흠뻑 빠져버린 강물 한가운데.

 

“네.”

“…….”

“결혼해요. 나랑.”

 

노아가 함께 축축해진 꼴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구부러지지도 부러지지도 않는, 차라리 총천연색이라 믿고 싶어지는 눈부심으로.

 

 

LOVE&PEACE

 

 

“하드 메탈 좋아한다고 했었잖아요, 나.”

“네.”

“사실 거짓말이었어요.”

 

네? 에녹이 눈을 홉뜨자 노아가 좀 웃었다. 거짓말이라고요. 사 학년 되어서 처음 들어봤어요, 록 음악 자체를.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고해성사보다는 차라리 사랑 고백에 가깝게 친근하고 내밀했다. 에녹은 저도 모르게 몸을 옆으로 내뺐다. 자취방 바닥에 나란히 누운 처지에 그런다고 얼마나 더 멀어지겠냐마는.

 

“아니, 그런 거짓말을 뭐 하러……득 볼 일도 없는데.”

“에녹을 볼 일이 생기잖아요.”

“……그러고 보니 노아, 개강 총회 때…….”

“우와, 이제 기억 나요?”

 

침묵.

 

“그러면 저더러 ‘너 같은 킹카가 나랑 사귀어줄 리도 없는데’라고 말하며 울던 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장의 허리를 자르고 비명이 끼어들었다. 에녹은 이미 발작하듯이 상체를 일으켜 앉은 상태였다. 경악이 깃든 눈동자는 분명 노아와 같은 시점을 떠올리고 있음이 명료했다. 그래, 이제 기억이 나긴 하나 봐……. 맑게 웃는 애인을 앞에 두고도 에녹의 낯은 도무지 펴질 줄을 몰랐다. 그게 또 솔직하고 재밌어서. 노아는 에녹을 달래지도 않고 혼자서 그 순간을 즐겼다.

 

“지…집에 갈래요.”

“네? 여기가 에녹 집이잖아요.”

“아뇨. 여긴 자취방이죠. 본가로 갈래요. 도망칠게요.”

“지금 시간에 기차 예매가 되기나 하겠어요?”

 

버둥대는 에녹의 허리를 끌어안자 움직임이 뚝 멎었다. 걸어서 갈래요. 그렇게 선언하는 비장한 목소리가 상황에 영 어울리지 않아 우스꽝스러웠다. 환하게 불을 켜둔 원룸. 창문 너머 엷은 어둠. 매트리스와 테이블과 일인용 소파를 피해 드러누운 두 사람. 여기서부터 걸어서 한리단길까지 갈 수나 있겠어요?

 

“그럼 차라리 죽을래……. 왜 진작 말 안 해줬어요? 진짜 못됐어! 사탄!!”

“그 사탄과 사귀는 소감은 어떠세요.”

“고백 취소할래요.”

“뭘 취소하시려고요, 방금 한 거? 아니면 개강 총회 때 한 거?”

“아, 이 사람 대체 왜 이러지!?”

 

왜 이러냐면.

당시 백노아를 이루던 것은 대부분이 권태였기 때문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외모를 갖추고 나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사람은 생각보다 알기 쉽다는 것을. 또래가 뭉치면 그 중심은 당연히 제가 되고 마는, 그 속에서 물음표 딸린 문장만 받아본, 하루하루가 보그지 인터뷰와 다름없는 일상. 무의의한 만연체투성이의 언어 틈바구니에 있다 보면 또 자연스레 알게 된다. 인간은 생각보다 욕망에 주저 없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백노아는 수시로 누가 갖고 싶어 하는 트로피가 되었다가 벽장 속에 숨기고 싶은 비밀스러운 어린 날의 상장이 되었다. 여느 클리셰처럼 차라리 그가 미인답게 멍청하기라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애석하게도 한국대 도예과는 미대치고 수능 성적을 빡세게 반영하기로 유명했다.

 

교복 입고 다니던 미성숙의 시절에야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교복이 학과 점퍼가 된 뒤로도 사람들은 줄곧 정신 차릴 줄을 몰랐다. 여전히 욕망과 야망을 줄줄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 보였다. 수능 성적이랑은 별 연관성이 없나 봐, 이런 건. 술에 강한 것치곤 술자리는 기꺼워 않는 것도 그래서. 알코올 때문에 풀린 뇌에서 별말 다 하는 걸, 와중에도 자기가 별말 다 하고 있다는 걸 숨기고 싶어 하는 또래의 추태를 참아줘야 하니까.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그 근방 거리를 이루는 모든 구성물이 조야하던 술집의 실외기 옆에 쪼그려 앉은 에녹을 보는 시간이 그렇게나 즐거웠던 건. 적어도 그는 솔직했으니까. 불쾌하게 만들지도 않고, 자기 객관화도 잘 되어 있고(아니 사실 자존감이 좀 낮은 것 같긴 하고), 귀엽고…. 커트 코베인이 무대에서나 말할 법한 멘트를 진짜로 하고. 반쯤은 소속집단의 강동원, 다른 반절쯤은 똑똑하고 고약한 청개구리로 살아왔던 노아는 그때 난생처음으로 남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어졌다. 누구의 이름도 적히지 않은(과 씨씨 전적이 있다는 소문은 그가 직접 퍼뜨린 구라였다) 트로피로 살아가는 일도 지겨워졌고.

 

눈앞에서 웃는 에녹의 미소가 축축하고 환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