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나의 신
@삼번국도

1.

대문 앞에 녹슨 대포가 하나 있다.

에녹은 언제나 그 대포의 존재를 의식해왔다. 무기라서? 가운데 뚫린 구멍으로부터 나올 포환이 두려워서? 아니, 단지 대포의 위치가 문제였다. 그 고루한 설치물은 벽에 완전히 붙지는 않았으면서 정중앙에 있지도 않았다. 심지어 모든 대포가 동일한 방식으로 띄엄띄엄 설치된 상태였으므로, 누구도 그것들을 기껍게 여기지 않았다. 기묘하다면 기묘한 현상이다. 따지고 보면 대포는 아무 잘못이 없고 단지 거기 설치된 대로 계속 있었을 뿐인데. 오히려 요새에 기어들어 와 뻔뻔하게 살림을 차린 인간 쪽이 불청객이지 않은가.

어쨌든 이제 누구도 대포를 유의미한 물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포뿐만이 아니다. 그 성채에 남은 모두가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이제는 누구도 대포가, 성채가, 구시대가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됐으니까. 그렇게 되어버렸으니까. 그러나 대포와 에녹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대포와 달리 에녹은 언제든 자리에서 털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에녹은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다. 2주 만에 겨우 딛고 일어선 이부자리는 폭격이라도 맞은 양 엉망이었다.

올해 여름 감기는 유달리 끈질겼다. 조그만 탁자엔 죽 그릇이 쌓여 있었고, 둥글게 구겨진 휴지들은 바닥을 뒹굴었다. 안 그래도 몇 벌 없는 옷은 거의 한 달 가까이 구석에 처박혀 퀴퀴한 내가 났다. 에녹은 크고 깊게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그리고 좁은 방을 몇 바퀴씩 돌았다. 쓰레기봉투가 삼분의 일쯤 찼을 무렵 겨우 허리를 폈다.

 

그러고 보니 옆집이 조용하다.

이 허접한 판자벽 너머로는 별소리가 다 들리는 게 정상인데, 요 2주 동안은 그런 일 없이 아주 조용했다. 원래라면 가끔 비명까지 들리곤 하는 집이 거기였다. 남에게 알려지면 안 되는 사람들이 거길 들락대는 모양이었다. 그래, 열에 시달려 정신없는 와중엔 싹 잊고 있었지만, 그 남자, 그 남자는 아무래도 어딘가 수상하다. 그야 사정없이 이딴 데서 사는 사람 없다지만.

 

쓰레기봉투를 묶으며 에녹은 옆집과 맞붙은 벽을 흘끔흘끔 보았다. 그런다고 옆집이 훤히 보일 리도 없지만. 그 남자가 이렇게 조용하게 살 리가 없는데. 그야 그 사람은 담배 냄새도 이상하고, 악수하자고 내민 소맷부리엔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는 데다…남이랑 악수하는데 장갑도 안 벗었어. 저녁엔 언제나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새벽에는 늘 수상하게 쿵쾅댔으면서…요즘은…어쩐 일이지. 에녹은 혼잣말과 함께 매듭지은 쓰레기봉투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옆집 이웃과 마주쳤다.

 

대포를 끌어안은 건지 대포에 걸려 넘어진 건지 모르게 엎어진 피투성이의 남자를.

 

2.

에녹은 장 씨가 아니었지만, 성채에 사는 주민은 에녹을 대체로 장 선생이라고 불렀다. 이름을 물을 때마다 둘러댄 결과였는데, 그의 ‘아버지’가 좋아하는 배우가 장 씨인 데에서 명백한 영향을 받았다. 일 년 동안 아홉 편의 영화를 찍으며 처절하게 혹사당하던 그를 에녹은 먼발치에서 지켜본 바 있었다. 아니 어쨌든.

비록 거짓과 얼버무림 끝에 탄생한 이름치고, 장 선생이라는 명칭은 에녹의 마음에 들기까지 했다. 장 선생이라는 페르소나는 말랑하고 부드러웠으므로. 구룡성채의 장 선생은 내전에 휘말려 홍콩으로 밀려들어 온 난민으로, 그 과정에서 많은 시체를 본 탓에 심약해졌을 뿐인 선량한 청년이다. 아이들은 장 선생을 곧잘 따랐고, 어른들은 삼합회의 눈에 띄고 싶어 하지 않는 조용한 청년을 어여삐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장 선생에게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런 가난한 사정을 가진 난민이 어떻게 성채 최상층의 가장 넓은 집을 차지할 수 있었는지. 어째서 정육점을 지나칠 때마다 눈을 질끈 감고 마는지. 삼합회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면서 왜 그들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지. 달에 한 번 당신의 집 앞을 서성거리는 그 민머리의 남자는 누구인지.

그러니까 에녹은 옆집 남자가 불편했다. 옆집 남자는 자꾸만 뭘 물어보고 답을 받아내려 들었으니까. 장 선생이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만 쏙쏙 골라 던지면서.

 

옆집 남자. 즉, 노아.

장 선생에 비하면 그 남자는 한 번도 선생이라 불린 적이 없다. 따지고 보면 의사 면허가 있는 노아야말로 선생으로 호명될만한데도. 또한 성으로 불린 적도 없다. 그는 오히려 자기 이름만을 내걸고 이 거대한 공동에 걸어 들어왔다. 이 또한 성채의 주민들은 그러려니 했다. 집안 따위 차라리 저버리고 싶어 안달인 사람이 수두룩했으므로.

 

일 층에서 국수를 파는 학부모에게 직접 그릇을 돌려주고 오는 사이, 옆집 남자는 어느새 벽에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표정도 몸 상태도 영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있으니 그거로 감지덕지,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옆집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에녹은 왜 장 선생이라고 불리나요? 아닌 것 같던데, 장 씨.”

 

수직 강하하는 입가를 보고도 그는 만면에 웃음을 걸친 상태였다. 비위도 좋지. 피투성이로 남의 집 앞에 쓰러져 있었으면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웃는 꼴이라니. 물수건으로 핏자국을 다 닦아낸 이웃의 안색은 비교적 곱기까지 했다. 에녹은 보란 듯이 노아의 맞은편 침대에 걸터앉아 들고 온 비닐봉지를 열었다.

 

“핏자국을 닦아주면서 좀 봤는데…당신 몸 상태가 심상치가 않더군요.”

 

그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연고와 붕대, 소독제, 그리고 반창고를 순서대로 꺼내는 동안 비닐 소리만 괜히 요란하게 났다. 바스락바스락 바스락.

 

“혼자 붕대 감아보겠다고 움직여서 상처라도 벌어졌다가는 곤란하니까…. 제가 대신해드릴게요.”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리자, 노아는 감사합니다 한 마디를 읊조릴 뿐 반응이 없었다. 몸을 일으켜 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뺨을 긁적이는 손끝. 에녹은 덩달아 다소 긴장했다. 뭘 망설이는 거지. 상황 파악? 의심? 아니면 이제부터 부탁할 다른 무언가?

 

“…비꼬려는 의도가 아니고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요, 그 ‘장 선생’이라는….”

 

헛소리였군.

 

“그 가운을 뜯어서 붕대 대신으로 쓰기 전에 여기 올라와 앉으세요.”

“넵.”

 

한 번 뭉갠 것치고 남자는 순순히 에녹을 따랐다. 옷도 벗으라는 대로 고이 벗더니 정사각형에 가깝게 접어두기까지 했다. 그 위에 살포시 올라간 장갑. 그게 벗겨지기도 하는 물건이었군. 제2의 피부인 줄 알았는데. 에녹은 심술궂게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너른 등에 피부 색깔을 갖춘 구석이 몇 군데 없었으나 에녹은 의연하게 연고를 어디에 바를지 눈어림했다. 옆집 남자 식으로 말해보자면, 지금의 그는 장 선생이 아닌 에녹이다. 장 선생이라면 목하의 광경을 두고 이렇게 반응할 것이다. ‘어디서 이렇게 험하게 다쳐오셨어요. 몸을 이렇게 함부로 쓰시면 큰일나요.’ 울먹이느라 떨리는 가느다란 목소리는 덤. 하지만 에녹은 그러지 않는다.

물론 노아 역시 일언반구를 않는다. 겨우 피가 멎은 상처에 소독제를 뿌리는 중인데도 어깨만 몇 번 떨었다. 보기보다 강단이 있었다. 얽혔다간 곤란해지는 사람들만 골라 받아 치료하는 의사는 깡도 남다르다는 건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대뜸 질문할 땐 언제고 갑자기 이런 변화구. 에녹은 그의 의중을 헤아리고 싶었으나 눈앞엔 오로지 창백한 흰색으로 덮여가는 상처투성이 등밖에 없었다. 연고 통에서 크림을 큼지막하게 덜어 바르자 등 근육이 움찔 경련했다.

 

“미리 대답해두겠는데, 누구로 속여 말해서 장 선생인 건 아녜요. 개인 신상을 아무 데나 말하고 다니지 않는 버릇이 들어 그래요.”

“왜 나를 구태여 치료해주고 계시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

“…퉁치기 없음.”

 

어지간히 놓칠 수 없는 기회였는지 노아가 에녹 쪽으로 몸을 휙 돌렸다. 조금 전의 뚜두둑 소리가 허리에서 났는지 목에서 났는지 모르겠는데. 이 사람 괜찮은가. 과연 찡그리는 표정으로 봐서는 별로 괜찮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누가 퉁친대요.” 노아는 연고를 바른 등에 붕대를 둘둘 감았다. 노아는 다시 몸을 똑바로 돌리며 웃었다.

 

“설마 했죠.”

 

……잠깐, 칼 맞은 데에 연고 발라도 되던가? 이미 바를 대로 다 발라버리긴 했지만…. 선량한 사마리아인은 소독제와 연고에 붕대까지 다 감은 뒤에야 늦게나마 고민했다.

 

“그야 상식적인 선에서 집 앞에 사람이 쓰러져 있으면 걸리적 (동시에 노아가 소리를 빽 질렀다. 걸리적거린다고요?!) 아니 걱정이요 걱정. 걱정되니까…. 그리고 옆집 사람이 시체로 발견되면 저도 수사망에 오를 텐데 그런 일은 사양하고 싶거든요.”

“와, 하나같이 엄청나게 현실적인 이유인걸요...”“그리고 피를 싫어해요. 무진장.”

“아.”

 

이제 막 병상에서 일어난 관자놀이가 다시 지끈댔다. 한 달 전이 맹란절孟蘭節이었다. 음력 칠월의 보름엔 지옥문이 열리고 모든 혼령과 귀신이 땅으로 내려온다. 대체 어느 동네의 신이 혼의 귀향을 허락했는지 에녹으로서는 영영 모를 일이다. 그가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면 결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 테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일 년에 한 번 때아닌 여름 감기를 신병처럼 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제 알겠어요?”

“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에녹 씨는 친절하군요.”

 

흡족한 목소리. 엎드려 절 받기가 그렇게 기쁜가. 에녹은 뭐라고 한마디 더 쏘아붙여 주려다가 그만두었다. 한 차례 크게 열이 올랐다 식고 난 관절이 삐걱댔다.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아야지. 그러는 사이 새로 뜯은 연고 통은 절반이 동났다. 에녹은 싸구려 플라스틱 통을 너덜너덜한 이웃의 손에 쥐여 주었다. 허리 아래부터는 손이 닿을 테니 알아서 치료하라는 취지였다. 집에 걸어서 가실 수는 있겠죠. 노아는 아주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웃었다.

 

“네, 어떻게든 걸어갈 수는 있을 것 같네요. 덕분에. 그런데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또 뭐요.”

“붕대 감는 법…. 모르죠?”

 

침묵. 암묵적인 긍정.

 

“해주실 때는 몰랐는데, 몸을 움직이려니까 이거 원 붕대를 감은 건지 두른 건지…….”

 

정적. 이번에도 긍정일지는, 누구도 모를 것이다. 에녹은 일어서서 어질러진 짐을 정리했다. 용건 없으면 나는 집 청소나 마저 할 테니 너는 눈치껏 가라는 의미였다. 노아는 그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읽지 못한 체했다.

 

“들려요? 에녹 씨? 저 지금 테이프에 둘둘 감긴 콤팩트 카세트가 된 기분이라구요.”

“……몰라요! 알아서 하세요!”

“악!”

“알아서 걸어가시고 연고 꼬박꼬박 바르시고요. 알겠어요?!”

“아니 세상에 환자를 때리는 사람이 어딨…악! 밀지 마세요! 등에 난 상처 다 봤으면서!”

 

3.

등을 얻어맞은 뒤 쫓겨나다시피 나오고서도 기어이.

노아는 은혜 정도는 갚게 해달라며 식사 약속을 다짐했다. 그리고 정말로 에녹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구룡만灣이 훤히 보이는 쓰허위안 구조의 요릿집이 목적이였다. 걸어서 십오 분 걸릴까 말까 한 거리를 두고 근대화의 눌어붙은 찌꺼기와 아름답게 보존된 전통 가옥이 나란히 지어졌다니. 이게 부조리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에녹은 두 걸음쯤 뒤에서 동행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그는 예약을 확인하는 중이었는데, 의사 가운으로 둘러싸인 등은 쓰러졌던 역사조차 잊은 듯이 수직으로 곧았다. 안 그래도 마른 체형이 가만히 서 있으니 꼭 밟히기는커녕 누구와 스친 적조차 없는 흰 기둥처럼 보였다. 연고를 발라주며 보았던 굽은 등이 저 사람의 것이었다고는 믿기도 힘들 정도였다.

상처는 이제 괜찮으신가요. 내가 제대로 치료해주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그 후로 다른 병원에는 갔나요. 묻고 싶었으나 지금 꺼내기에는 너무 뜬금없고 부끄러운 내용이었다. 에녹은 잠자코 노아를 따랐다.

 

“지인을 통해서 소개받지 않고서는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에요, 여기.”

“…인맥이 넓은가봐요.”

“진료를 봐 드렸던 고객 가운데에 미식가가 한 분 계셨거든요.”

 

과연 그가 미식가이기만 했을까. 신발을 벗고 들어선 목조 저택의 바닥에선 가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치파오를 입은 종업원이 별실로 가는 길을 안내해주었다. 그리고 별실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등을 향해 정중히 인사하고 떠난 참이었다. 그만한 융숭한 대접은 오랜만이라 에녹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좌식 탁자 주변을 서성였다. 찻잔과 수저가 놓인 자리를 골라 앉은 노아는 태연했다. 움직일 수 있는 안면 근육이 한정된 사람처럼. 하기야 에녹이 떠올리기로도 이웃이 보여주는 표정은 그 종류가 애당초 적었다. 허름한 콘크리트 벽 앞에서도 웃는 얼굴. 그리고 달마도가 걸린 비단 벽지 앞에서도 웃는 얼굴.

 

탁자엔 메뉴판이 없었다. 구겨진 미간을 본 노아가 웃었다.

 

“정해진 코스가 있어서 따로 고를 필요 없어요.”

 

그걸 누가 몰라.

한편 나지막한 목소리로 귀띔해주는, 저 이웃 남자는 결코 모르겠지만, 에녹은 메뉴판이 없는 식당을 딱 두 번 가봤다. 홍콩에서 이런 식당을 올 방법은 딱 세 가지. 태생적으로 부유하든가, 정치나 사업을 하든가, 저 둘과 얽혀 깡패짓을 하든가. 한편 장 선생은 정치가도 사업가도 개깡패도 아닌데다 저번 달 수업을 거의 통째로 빼먹은 빈민이다. 결근만 했는가. 무상으로 간호까지 받았다. 민심에 기대어 사는 처지에 악덕 사채업자처럼 꼬박꼬박 돈을 받아낼 수는 없지 않은가. 즉 지금의 그는 무참할 정도의 빈털터리였다.

 

별실 안으로 들어오는 종업원들은 전부 친절했다. 성역을 침범한 죄인처럼 머리를 수그리고 들어왔다가 빠르게 나갔다. 이런 곳을 올 능력이 있는 사람이 왜 그 닭장 같은 집에서 살까. 하기야 에녹조차 사실은 ‘장 선생’이 아닌 사람이다. 누군가는 기어코 선택해서 구룡성채에 있다.

 

“주방장이 사천 사람이라 매운 요릴 참 잘한다던데, 에녹. 잘 됐죠?”

“누가 들으면 친해 보일 위험성이 있으니까 제 이름 막 부르지 마세요. (아이 친하잖아요 우리. 노아가 잽싸게 떡밥을 물었다) 그리고 왜 굳이 그런 말을….”

“왜겠어요?”

“자차이 무침에 대해서는 사과했잖아요! 내가 생각해도 고추기름을 너무 막 썼다고.”

 

에녹의 언성이 높아졌다. 명백하게 부끄러워하는 티가 났다. 열이 올라 빨개진 목을 보던 노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종업원이 내려놓은 접시들을 에녹 가까이에 밀어주며, 그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요, 이해해요. 무엇보다 옆집에서 나는 기침 소리를 계속 참아줘야 했던 에녹도 층간소음이라는 측면에서는 피해자니까.”

“알면 이런 얘기는 하지 말죠? 저 아직도 층간소음의 피해자가 된 기분이구.”

“아니, 궁금해서요. 그 이전에 준 고기볶음도 기억하기로 비슷한 맛이었는데, 혹시 개인 취향인가….”

“…그래 놓고 말린 고추를 선물해주시길래 좋아하시는 줄 알았죠.”

“하하, 참. 역시 말발로 먹고사는 사람에겐 이길 수가 없어.”

“칭찬 감사합니다아.”

 

속으로는 노아의 등짝을 때리는 상상을 하던 에녹이 젓가락을 들지 않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문질렀다. 잘 코팅된 원목 특유의 매끄러운 표면을 문지르면서도 불청객이 된 듯한 마음은 그저 까끌까끌.

 

“노아 씨, 그런데 저….”

 

하고, 한참 말이 이어지지 않았으므로 노아가 대신 입을 열었다.

 

“네 말씀하세요.”

“…이런 식당을 올만큼 말재주가 좋진 않은데.”

“그거야 뭐, 몸으로 때우시면 어떻게든. 아, 버섯도 좀 먹어봐요. 맛있다.”

“네?!”

 

앞접시에 덜어준 버섯은 보지도 않고 에녹이 젓가락을 멈췄다. 덩달아 노아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에녹 버섯 싫어해요?” 흰 얼굴이 배시시 웃었다. 노아는 웃을 때 차오르는 애굣살에 눈물점이 가려졌다. 가까이서 보고 처음 알았다. 아니 무슨 소리야 뭐가 차오르든 말든. 조금 전의 질문은 누가 봐도 고의로 짚은 헛다리다.

 

“제가 지금 버섯 싫어서 이러는 것 같아요?”

“에녹은 딱 봐도 샌님이라 거친 일 시키지 않을 거예요. 해봐야 주방 보조?”

 

에녹은 배신감에 손을 떨었다. 죽어가는 사람 주워줬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음침하게 중얼거리고는 젓가락을 잘게 부딪쳤다. 돼지고기가 무력하게 툭 떨어졌다. 노아는 마냥 재밌는지 올라온 모든 음식을 에녹에게 신나게 덜어주었다.

 

“얼른 드세요. 그래야 한 접시라도 더 치우지, 안 그래요?”

“노아!”

“제 말은, 종업원이요. 얼른 다 먹은 접시를 치워야 다음 요리가 나오잖아요.”

“진짜 복수할 거예요.”

“네 복수하세용.”

 

그래도 에녹은 일단 주는 대로 열심히 집어 먹었다. 노아 역시 뒤늦게 제 몫을 야무지게 해치웠다. 몫이래 봤자 에녹의 잔반에 가까웠지만.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맛본 요리들은 하나같이 훌륭했다. 한계까지 돈을 저금하느라 궁핍해진 에녹의 입엔 뭐가 들어오든 다 산해진미처럼 느껴졌다.

 

디저트로 준비된 행인두부가 나올 즈음, 손목시계를 살피던 노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시에 진료가 있었는데 그걸 잊었네. 에녹은 별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한 시 오십 분. 이거 꽤 촉박하지 않나? 약속 시간 삼십 분 전에 장소에 도착한 사람처럼 여유로운 낯이었다. 뭘 믿고 저러지. 하긴 노아는 대체로 저런 태도이기는 했지만.

 

“대접은 끝까지 해줘야 하는 건데, 미안해요.”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또 칼이라도 맞았다간 또 저까지 곤란해지잖아요.”

 

제가 듣기에도 서운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에녹은 뱉어놓고 내심 놀랐다. 나 설마 아쉬운가? 이 상황이. 눈치를 못 챈 건지, 모르는 체하는 건지 노아는 말없이 웃어주고 방을 나섰다. 에녹은 디저트용 스푼을 쥔 채 사라지는 등을 끝까지 보았다. 예의 바르고 말끔하던 미소가 짙은 원목 바닥에 어른거렸다. 답도 없이 끝없는 의문이 몰려들었다. 치과 의사 노아는 평소에 저런 표정을 짓고 다니나. 그럼 자기 앞으로 오는 환자한텐 다 저렇게 웃어주나. 나 지금 설마 아쉽니. 이거 정신병일지도.

 

…그러고 보니 저 남자 계산은 했나.

아니, 성질머리가 얄궂긴 해도 악질은 아니니 최소한 자기 몫은 계산했겠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생각을 하니 또 손바닥에서 땀이 절로 배어났다. 에녹은 행인두부를 한 입 먹다 말고 바지에 손을 쓱 닦았다. 일 인분 어치 식사에 몇 년 치 일거리가 청구될까. 메뉴판을 못 봐서 어림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실패한 수학 교사가 된 기분이었다. 결국 에녹은 얇은 지갑 구겨지도록 쥐고서 별실을 나섰다.

그리고 계산대의 위치를 묻는 그에게, 종업원은 예의 바른 태도로 설명해주었다.

 

“저희 식당은 선불 예약제입니다. 손님.”

 

4.

장 선생으로 사는 일이 익숙지만은 않다. 에녹은 성채에 붙박인 수많은 난민에게 비하면 형편도 입주 기간도 풋내기 수준에 속했다. 그러나 신참 기준으로도 보통이 아닐 만큼, 그놈의 이웃 사람은 장 선생에게 유달리 살가웠다. 아니 이 경우 노아의 기준에 맞춰 장 선생보다는 에녹이라 부르는 편이 맞겠다.

 

그는 에녹에게 직접 만든 요리를 대접하기도 했다. ‘홍콩의 미래를 책임지시는 선생을 한 번쯤 도와드리고 싶다’는 취지에서였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으나, 그가 직접 요리했다는 반찬들은 의심할 구석 없이 맛있었다.

 

노아에게 퍼스널 스페이스의 기준이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날이 갈수록 모호해졌다. 그는 두 집이 하나의 공장 부지이던 시절부터 살아온 사람처럼 뻔뻔하면서 동시에 어떤 부분에서는 끝없이 엄격했다. 간식을 사 왔다며 열어줄 때까지 끈질기게 문을 두들기던 날, 에녹은 정말이지 이 사람이 내 옆집이 아니라 옆방에 사나 싶었다. 그런가 하면 벽에다 대고 반찬 좀 받아 가실래요, 하면 묵묵부답이면서 초인종을 누르면 재깍 뛰어와 반기기도 했다. 자기 목소리가 벽 너머로 들리는 건 즐겼으면서 에녹의 목소리는 죄 못 들은 체했다. 아무래도 나름의 확고한 기준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에녹으로서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야 장 선생과 에녹의 상관관계에 대해 캐묻던 사람이 어쩐 일로 예의 바른 척을 다 하니까. 시공 후져서 벽에 등만 기대도 뭐든지 다 들리고야 마는 가설건축물의 무덤에서 살면서 시치미 떼기는. 그래도 결국 그는 노아를 못 이겼다. 각진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은 유달리 에녹 앞에서만 서글서글했다. 그 흰 낯에다 대고 뭘 더 말해. 어디 침 뱉을 구석이 있어야지. 그런 외모라니 비겁하고 치사하다. 에녹은 손안에서 구겨버린 답안지를 손바닥으로 벅벅 문댔다. 아름답고 심상찮은 이웃 사람의 행적을 홀로 되짚고 난 결과물이었다.

초가을의 대낮. 오랜만에 열린 수업을 훼방 놓을 작정인지 강렬한 직사광선이 옥상에 내리꽂혔다. 문제를 풀기 위해 고개를 숙여 드러난 뒷목들은 벌써 뻘겠다. 답안지를 옆구리에 낀 채, 선생은 챙겨온 선크림을 들고 책상 사이를 누볐다. 아이들의 손에 선크림을 나눠주던 무렵 학생 하나가 불쑥 에녹을 불렀다. 선생님.

 

“네~?”

“저, 노아 형이 좋아요.”

 

네? 에녹이 짧게 되물었다. 정확히는 ㄴ-에? 에 가까운 얼빠진 소리가 났다. 아니 아저씨도 선생님도 아니고 형은 또 무슨 형. 고개를 들자 선크림을 발라 미묘하게 하얘진 얼굴이 보였다. 위천. 에녹은 학생의 이름을 읊조렸다. 형을 따라 알음알음 수업을 듣다가 이제는 정기적으로 출석하게 된 성실한 친구 중 하나였다. 그의 형은 일찌감치 졸업했다. 선생님은 너를 믿었는데. 못 본 사이 머리도 짧게 깎았고. 선생님을 배신할 줄도 알고.

 

“저번에 메이랑 같이 집에 가는데, 그 형이 저희한테 간식을 사주셨거든요.”

“잘됐네~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은 먹는 게 아녜요.”

“엥! 모르는 사람 아니잖아요.”

 

……모르는 사람은 아니지. 장 선생이 말하지 않는 사이 위천 옆에 앉은 메이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분이 선생님네 옆집 사시니까! 그쵸?” 자신감 넘치는 증언과 함께 치켜든 연필의 다 닳은 심이 반짝 빛났다. “메이, 그 연필 깎아야겠는데요.” 메이는 은근슬쩍 대답을 흘려 넘긴 선생에게 순순히 연필을 건네주었다.

 

“맞아, 노아 형이 그랬어요. 자기 신원은 장 선생님이 보증해줄 거라고.”

 

보증? 누구 마음대로 보증. 그래 그러니까 생각이 난다. 선생님은 말이지 팔촌 친척의 보증을 잘못 서줬다가 결딴난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학생 여러분도 누가 보증을 들어달라 하면 그 길로 곧장 도망을 가야 합니다. 나는 여기가 이미 도망길이라 또 도망갈 수도 없는 처지지만.

 

“…그리고 그분이 위천네 첫째 오빠 치과 진료도 공짜로 봐준 적이 있댔어요.”

“…공짜로요? 그 사람이?”

“네, 진료도 되게 잘 봐줬대요. 그래서 위천이네가 원래 노아형을 좋아해요 다들.”

“좋은 사람인 건 맞잖아!”

 

하긴 그 사람 씀씀이를 보아하니 구룡성채에서의 생활은 유희일 뿐이고 의사 일도 그저 취미 생활의 일부 같기는 했다. 그래, 돈이 많아도 도망치고 싶을 수도 있겠지…. 한편 선생이 말이 없는 사이 아이들은 저들끼리 쑥덕댔다.

 

“노아…. 치과 거리에서 영업하시는 그 의사 선생님 말이지? 손에 검은 장갑을 낀.”

“너도 알아?”

“알지. 저번에 나한테 자기 집에 진짜 사람 치아로 만든 단추가 있다고 자랑했었어.”

“웩, 진짜?”

“응. 공부 열심히 하면 나한테 선물로 줄 수도 있다고까지 했다?”

 

마지막 말에 연필을 깎다 말고 에녹은 그만 제 살을 깎을 뻔했다. 노아가 그런 단추를 가졌는지 에녹은 꿈에도 몰랐다. 뭐 얼마나 자랑을 하고 다닌 거야. 정작 나한텐 반찬이 어떻네 어제 저녁이 어떻네 그런 말만 하면서. 치아로 만든 단추라니, 그런 쓸데없고 위험한 정보를 아무 맥락 없이 말하고 다녀도 돼? 잠깐, 나는 왜 이렇게 자존심 상한 사람처럼 굴고 앉았는데. 그는 정신을 차리고 목도 한 번 가다듬은 뒤 선생으로서 제일 그럴듯한 조언을 궁리했다. 그리고 애써 엄숙한 목소리로.

 

“…그런 걸 누가 주면 안 받는 게 제일 나아요.”

“에이 쌤, 당황하실 거 없어요. 쟤가 멍청한 구석이 있지만 사리 분별은 해요.”

“야!”

 

아니 사실 너희 때문에 당황한 게 아니란다. 에녹은 몽글몽글 솟아나오는 진실을 애써 삼켰다. 대신 칠판을 두들기며 큰 소리로 공지했다. 오늘치 문제 빨리 풀어서 제출하고 숙제 받아가세요. 그런 선생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학생들은 시종 유쾌했다.

 

5.

이제, 선생이 아닌 에녹의 이야기.

에녹에게는 이따금 편지가 온다.

 

사실 그들을 가리켜 편지라 하기에는 다소 모호한 구석이 있다. 편지가 갖춰야 하는 양식을 전부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수신인부터 시작해서 발신인, 주소지, 우편 번호는 물론이거니와 서두와 말미에 으레 붙는 미사여구까지. 모든 점에서 부족했으므로 제 삼자가 보자면 그건 다만 직사각형의 싯누런 종이일 뿐이었다. 다만 일정한 주기를 철저히 지켜 보내졌으므로 차라리 고지서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그래, 에녹은 매달 첫째 주 아침마다 고지서를 받는다. 두 나라 사이에 걸쳐 법률과 도덕률의 구석빼기에 은밀히 자리한 이 건물에도 고지서는 온다.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다.’ 붉은 붓글씨로 정갈히 쓰인 한 문장의 전언. 바로 그 한 줄이 저 뭣도 아닌 쪽지를 고지서로 만들었고, 수신자를 부끄럽게도 했다. 에녹은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제 손으로 편지를 거둬들였다. 침대에서 현관까지는 성인 남자의 보폭으로 세 걸음 정도. 회색으로 얼룩진 타일 바닥으로 반쯤 틈입해온 종이를 쑥 꺼낸 뒤 다섯 갈래로 찢었다. 찢긴 종잇조각을 한데 모아 구기고 나면 망설임 없이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이 일련의 의식은 늘 꼭두새벽에 진행되었으며, 제사장은 이 의식을 비밀리에 부치기 위해서라도 일찍 일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에녹은 이번에도 잠에서 깨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 신발을 꿰어신고 현관으로 쿵쿵 걸어갔다.

 

시월의 첫 주였고, 어김없이 현관에 편지가 들어와 있을 날짜였다. 이제 날씨는 슬슬 겨울 초입에 이르렀다. 성채가 단열이나 난방 따위를 고려했을 리는 만무하고. 되려 햇빛이라도 좀 받아보겠다고 크게 낸 홑창으로 찬 바람이 들어왔다. 집안에서도 잠옷에 두꺼운 카디건 정도는 껴입어야 비로소 움직일 만했다. 이 근천스러운 환경 덕에 아침에 눈이 바로 떠진다는 사실만이 고르고 골라 찾아낸 유일한 장점이었다.

 

웬일로 문틈 새로 넣다 말았는지 편지는 ‘아버지’까지만 보였다. 에녹은 여상히 쪼그려 앉아 편지의 끄트머리를 엄지와 검지로 세게 잡았다. 힘주어 종이를 거둬가려던 에녹의 얼굴이 불시에 구겨졌다. 그는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까지만 내보인 채 그만 멈춰 선 종이를. 외부의 힘이 작용하기라도 했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 그것을. 에녹은 한 번 더 종이를 당겨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누군가 밖에 있다.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 누군가가 이 편지를 붙잡았다고.

 

오랜만이었다. 심장이 쿵 가라앉는 느낌은.

 

에녹이 손에서 종이를 놓자, 붙잡아두었던 두 모서리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어쩔지 고민하기를 약 일 분. 망설이다 다시 쑥 잡아뽑아 본 종이는 너무나도 쉽게, 맥없이 끌려왔다. 그리고 에녹은 발견했다. 직사각형의 기다란 종이 끄트머리에 찍힌….

신발 자국.

코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나 얌전한 무늬가 영락없는 정장 구두의 그것이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있었던 거야. 중얼거린 에녹은 벌떡 일어나 반사적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거기에는 겨울 아침처럼 희부연 남자가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노크할 듯이 왼손 주먹을 말아 쥐어 들고서는, 상당히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으로.

그리고 노아가 아침 인사를 채 꺼내기도 전에 에녹의 몸은 균형을 잃었다.

 

6.

“아니 그게. 발밑에 있던 게 갑자기 움직이니까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럼 뭐라도 소리를 좀 내든가요!”

“소리 죽이고 다니는 게 습관이 돼서….”

“미치겠네.”

“가끔은 도망치기도 해야 하는 직업을 가졌다 보니(치과 의사가요?! 에녹은 정말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웬만하면 소릴 안 내는 게 버릇이 됐어요.”

 

오늘의 노아는 드물게 완연한 저자세였다. 그는 조금 전 에녹이 나동그라지기 전에 얼른 잡아, 부축하고는 침대에 앉히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녹의 종아리에 바짝 붙어 앉은 모양새가 영락없이 고해하는 죄인이었다.

 

“에녹이 이렇게까지 놀랄 줄 몰랐어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아무래도 내 정신 상태를 눈치챈 모양이지. 그게 아니면 나 놀려먹는 맛에 사는 인간이 이렇게 고분고분할 리가 없잖아. 에녹은 예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이웃을 우러러보는 노아의 눈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에녹이 왜 이토록 과민하게 반응하는지 추측하려는 심산이 빤히 비쳐 보였다. 불쾌하진 않았다. 결국 배려 차원에서 하는 행동 아닌가. 그래, 노아는 뭐랄까…하는 행동에 가끔 악의가 있을지언정…기본적으로 나를 좋아해는 주니까.

 

“왜 말이 없어요, 에녹? 내가 혹시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요?”

 

무심코 한 생각에 에녹은 홀로 기가 막혔다. 미쳤구나 미쳤어. 머리가 깨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미친 거야. 아침부터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이 종이에 대해서 말해줄 게 있어요.”

 

에녹은 약간 구겨진 노란 종이를 똑바로 펴서 노아에게 보여주었다.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신다. ‘계신다’ 위에는 구둣발로 꾹 밟았다 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노아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에녹은 침을 삼켰다. 처음으로 편지를 바로 찢지 않았다. 변기에 던져 물을 내리지도 않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이거 하나만 보여줘도 저 남자는 전부 다 알아버릴지도 모르는데. 알아버려서,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도 있는데. 어차피 이런 데서 사는 사람치고 완전무결한 인간 없다지만 그래도.

 

“정 싫으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돼요. 모른 척할게요. 억지로 캐낼 정도로 궁금하진 않거든요.”

 

고뇌의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노아가 먼저 속삭였다. 에녹의 명치께가 일순 저릿했다. 왜?

 

“하여튼…나는 오늘 그냥 에녹 얼굴이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거고….”

“아니 내가 말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아하.”

“노아라면 잘 들어줄 것 같기도 하구요…….”

 

실연한 비운의 여인이라도 된 양 에녹의 바지 끝단을 만지작대던 노아가 활짝 웃었다. 그럼요, 대나무숲처럼 사람으로 들어찬 이곳에서도 나만큼 에녹 얘길 잘 들어줄 사람이 또 어딨겠어요. 그렇게 말해주는 태도는 매끄럽고 능숙했다. 노아가 얼굴에 띄웠던 웃음이 느리게 희미해졌다. 그가 에녹에게 물었다. 그래서, 여기엔 어쩌다가 오셨다고요.

이제 반대로 에녹이 웃고 있다.

 

7.

어떤 흐름은 개인이 감히 거스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장 선생이 고학력 엘리트의 신분을 거쳐 불법 입국 난민으로 전락했듯이. 주의 깊게 이야기를 듣는 노아를 에녹은 똑바로 바라보았다. 노아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에녹에게 있어서 천구백칠십년은 자갈 같은 불행이 도처에 널린 시절이었다. 거기로 굴러떨어져 무릎이 깨진 사람은 차고 넘쳤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근데 주인공은 하나도 없는.

 

신의군은 홍콩계 삼합회 조직으로, 당시 홍콩 본토에서 가장 많은 조직원을 거느렸으며 그들은 지옥에 떨어질 일이라면 뭐든 했다. 가끔은 가만히 있는 일도 등 떠밀어 지옥 불구덩이로 밀어 넣곤 했는데, 그런 방식으로 타락시킨 대표적인 산업이 영화였다. 이제 그들은 구룡성채의 치안권을 가지고 부패 경찰과 협력하기도 한다. 에녹이 갓 스물이 되어 몸담은 조직은 이런 곳이었다.

 

변명하자면, 에녹은 잘 몰랐다. 애초에 에녹이 살던 동네에서 신의군에 들어가지 않는 청년은 거의 없었다. 스물을 목전에 두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두 개 정도였다. 공장에서 열여덟시간 동안 미싱을 돌리고 식대 미포함 최저임금을 받든가, 신의군의 물류 창고 경비를 맡고 식대가 포함된 급료를 받든가. 무엇보다 당시 신의군은 그들이 자행하는 마약 폭력 도박보다도 영화사로 더 유명했다. 가난이 지긋지긋해진 청년들은 허상의 스크린으로 뛰어들었고 자갈에 무참히 부딪혔다. 이는 에녹도 예외가 아니었다.

 

몰랐든 알았든, 조직의 대문 너머에는 행불행을 넘어서는 것들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세상천지에 있을 수 있는 나쁜 것이란 나쁜 것은 뭐든. 이를테면 도박, 범죄, 폭력, 물과 피보다 진하다던 형제애, 소름 끼치도록 균질한 목소리들, 그들이 부르짖던 기나긴 맹세와 구호, 총소리와 짐승의 피. 그중에서도 에녹은 영화 산업과 관련된 업무를 맡았다. 예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는 항쟁 도중 싸움을 거부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죄를 저질렀는데 오히려 포상이 돌아온 격이었다. ‘아버지’의 부성애는 하해와도 같았으나 이는 아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에녹은 이따금 현장에 갔고 자주 그만두고 싶어 했다. 그는 언제고 에녹을 어르고 달랬다. 에녹, 일어나라. 사내자식이 왜 이렇게 함부로 무릎을 꿇냐. 일어나. 네 비굴한 모습을 이 아버지는 보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만일 네 이마가 깨질 때까지 절을 하겠다고 빈대도 네 원하는 바는 들어주지 않을 거다. 왜 그러냐. 네가 사람을 죽이기도 싫고 패기도 싫고 협박하기도 싫다고 해서 꽃밭에서 뛰놀 수 있게 해주지 않았느냐.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배려라기보다는 에녹의 깨끗함을 팔아 영화사의 얼룩을 감추려는 전략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에녹은 일종의 손수건으로써 이용된 셈이었다. 이쯤 되니 독립이 절실해졌다. 이 빌어먹게 아름다운 가족애. 내가 꼭 돈 바짝 벌어서 이 판 뜨고 만다. 그리고 지금은 '돈 바짝 벌어서'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려는 현재 진행의 상태. 에녹의 눈물 나는 탈출기는 아직 완결이 나지 않았다. 귀를 대보세요,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에녹은 숨을 골랐다. 담아두었던 속내를 풀자 기분이 한결 나았다. 심지어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마침내 조직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조그마한 조각마저 느껴졌다. 노아도 나를 응원해주겠지. 내가 아는 노아라면. 그러나 노아는 웃지도 화내지도 슬퍼하지도 않고 그저 에녹을 빤히 쳐다보았다. 에녹의 무릎이 가지런히 놓인 바로 옆에서 턱을 괸 채로.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짧은 정적이 흐른 뒤, 마침내 그가 꺼낸 말은 다음과 같았다.

 

“나, 어제 에녹의 문에 편지를 끼워 넣고 가는 아이를 보았어요.”

“……아이요.”

“네. 제가 저번에 과자도 사줬었는데.”

 

이제 에녹은 멍하니 중얼거린다. 위천.

 

8.

맹란절 이후 처음 있는 파업이었다. 에녹은 문제집 대신 떨리는 손을 맞잡고 아이들을 찾아다녔다. 메이는 선생의 창백한 얼굴을 마주하고는 울면서 사과했다. 젖살도 채 빠지지 않아 둥근 뺨이 느리게 축축해졌다. 에녹은 처참한 심정으로 그를 보았다. 아무리 찾아도 위천이 보이지 않았다. 이 개 같은 콘크리트 밭에서 바늘을 찾는 일은 빠르게 포기했다. 대신 위천의 형을 찾아갔다. 구룡의 무허가 공장에서 일하던 그는 졸업한 후 여행 가이드가 됐다고 했다. 그러나 찾아간 여행 회사의 프런트 데스크에서, 직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름의 직원은 회사에 없는데요.

 

그 뒤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를 찾아가 나름 적법하고 정당한 요구를 했을 뿐인데, 조직원들에게 털릴 대로 털렸다. 와중에 아버지 마음 아프지 마시라고 옷에 가려지는 부분만 골라 팼다. 눈물이 다 나는 효도 정신이었다. 눈물이 꼭 그 때문에 나는 것만은 아니었지만. 세상에 아들이 일탈 좀 한다고 아이를 데려가는 법이 어딨어요. 유언처럼 읊조리고 마지막으로 에녹은 기절했다.

 

처음 깨어났을 때는 밤낮 여부조차 알 수 없었다. 에녹은 물이 고인 검은 바닥을 멍하니 보았다. 목은 뻣뻣했고 가슴은 영 답답했다. 숨을 쉴 때마다 익숙한 악취가 폐부를 채웠다. 이 퀴퀴한 냄새는 분명 구룡 특산물이다. 그런데 나 어디에 엎드려 있는 거지. 아무튼 바닥은 아닌데…. 몸을 일으킬 힘이 없었다. 정확히는 힘을 줄 수 있는 부위가 남아있지 않았다.

별수 없이 엎드린 자세를 유지하던 에녹의 머리 위에서 문득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해요 선생님. 선생님이 저희를 이렇게까지 간절히 찾으실 줄은 몰랐어요. 거의 속삭이듯이 희미했고, 누가 말하는지 볼 수도 없었지만, 에녹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애써 눈을 굴리자 가까스로 검은 천에 감싸인 종아리가 보였다. 불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한 복도와 정장 바지의 경계를 구분하기 힘들기는 해도. 역시 위천이다. 위천이 내 머리맡에 서 있다.

 

“그래도 선생님 여기 사시니까 아시잖아요. 어차피 우리는 못 나가요. 어디로도 못 가요. 대체 어딜 갈 수 있는데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무어라 말해주고 싶은데. 한마디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그래도 선생님이 저흴 위해 애써주시는 거 좋았어요. 하지만 누군가를 지키려면 이 길밖에 없어요 저희한테는. 그러니까 너무 실망하거나 슬퍼하지 말아 주세요. 저희한텐 이게 최선이예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파서? 두들겨 맞느라 기력이 쇠해서? 어이가 없어서? 슬퍼서? 눈앞이 어른거렸다. 위천이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당연한 결과야. 나는 그럴 힘도 자격도 없었으니까. 에녹은 차라리 눈을 감기로 했다. 암전.

 

9.

“그렇구나.”

 

노아는 에녹의 죽과 함께 사 가지고 온 수프를 한 입 떠먹었다. 그의 거처는 이웃집에 비하면 슬플 정도로 실내가 어두웠다. 정작 거주자는 그 환경에 충분히 만족하는 모양이지만. 이곳에 잠시 기거하게 된 에녹도 마찬가지로, 차라리 해가 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밝은 빛 아래에서 지금의 제 모습을 봤다간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노아가 종일 붙어 붕대를 갈고 연고를 바르고 간호해준 덕에 많이 낫기는 했지만, 몸이 문제가 아니었다. 약간씩 각도가 흐트러진 가재도구의 전시장과도 같은 거실에서 두 사람은 딱 붙어 함께 식사했다.

 

“근데 그 소식이 그렇게 우울하게 고백할만한 물건인가요?”

“그게 무슨 소리죠?”

 

에녹이 눈을 홉뜨고 질문했다. 날카로워진 기분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투였으나 노아는 태연하게 수프에서 게살이나 골라 먹었다. 애들을 아끼는 줄은 알았지만, 설마 그런 계도를 꿈꾸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구요. 난 오히려 좀,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보는데. 평가하는 말에서는 뼈, 라든가 아니면 칼 따위에 빗댈만한 태도가 느껴졌다.

 

“에녹, 너무 기준점을 높게 잡았어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번에 알아들은 에녹이 어깨에 힘을 줬다. 가슴 한쪽에 매섭도록 파도가 쳤다. 무슨 소리야. 네가 내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내가 너에게 무엇을 건네주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우습게 알아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숟가락을 놓은 에녹의 손을 가죽 장갑으로 감싸인 손가락 다섯 개가 감쌌다. 죽 그릇만 노려보던 눈이 노아 쪽으로 굴렀다.

 

“…내 말은, 자격증 없는 교사가 일이 년 가르친 정도로 빠져나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란 거. 에녹도 알잖아요. 아마도 당신 곁에 현실적인 조언을 해줄 사람이 없었겠죠. 그렇죠?”

 

죽은 장 선생이 남기고 간 아름다운 유품이라도 된 양 이웃 사람이 속삭였다. 그래, 톺아보면 그랬다. 그 누구도 에녹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 선생이 될 수 있는지 가르쳐줄 수 없었다. 그런 방법을 알 만큼 교육받은 사람은 빈민굴에서 살지 않으니까. 에녹의 가르침은 선하고 정성스러웠으나 솔직히 주먹구구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 내가 뭘 어쩌면 좋았는데. 나처럼 사는 애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 그게 그렇게 잘못이야? 내가 주제 넘었냐고. 최선을 다하는 게, 숨통 좀 트이게 해달라고 발버둥 치는 게, 그렇게. 격앙된 감정이 오히려 목울대로 넘어오는 단어를 집어삼켰다. 머리가 아팠다. 노아는 침착하게 숟가락을 에녹의 손에 다시 쥐여주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에녹, 난 그런 식으로 말한 적 없어요.”

“…미안해요.”

“사과까지 하지는 않아도 되지만, 음, 어쨌든 그런 부분부터 차근차근 고쳐봅시다. 그날 그렇게나 맞고 온 것도 성격 때문에 그랬죠.”

 

할 말이 없었다. 홍콩 최대 규모의 폭력 조직 우두머리 앞에서 허리 편 상태로 할 말 다 하기는 했으니까. 그래도 당신이 왜 내게 그런 말을 해. 날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겨울바람이 거센 밀물처럼 성채의 벽을 두드렸다. 가만히 에녹을 들여다보던 노아가 속닥거렸다. 상대의 모든 행동을 두둔하는 건 이해가 아니라 맹목이에요. 난 에녹에게 그런 일 저지르고 싶지 않아요. 숨통 트이고 싶다고 했잖아요. 눈은 마음의 창이라더니 노아는 창문을 열어젖히더니 환기까지 시켰다. 바람의 두드림도 곧 멎었다. 에녹은 눈물을 겨우 참느라 글썽이는 눈으로 노아를 보았다. 저 좋다는 사람 하나가 너무나도 간절했다. 아스팔트 사이에서 자라난 새싹이 눈물겹다고 정성 들여 키웠더니 양귀비가 피어난 지금, 에녹은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정말? 정말 그래? 그러면.

 

“그러면 노아는 나……안 싫어해요? 앞으로도?”

“…에녹.”

“네.”

“조직에서 정말 나가고 싶어요?”

 

에녹은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였다. 뭐 그런 걸 다 물어봐. 내비친 표정에서 하고픈 말이 다 드러났다. 그러자 노아가 좋다고 또 웃었다. 근데 저 인간 왜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지. 뭐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는데. 예 아니오. 둘 중 하나 고르기만 하면 됐는데. 대신 노아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에녹이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다고. 뭘 도와줄 셈이냐고 묻기도 전에, 에녹의 수상하고 친절한 이웃이 직접 문장을 보충했다.

 

“뭐겠어요, 신의군을 나가는 일 말이에요.”

 

10.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구를 대로 구른 에녹조차 빠져나갈 개구멍 하나를 못 찾았는데 외부인인 노아가 어떻게.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 그런 건가. 속는 셈 치고 에녹은 강력하게 긍정했다. 당연히 나가고 싶죠, 아이들이 들어갔기 때문에 더더욱. 자식 같이 가르친 애들이 거기서 사람 패는 꼴을 내가 어떻게 봐요……. 답변을 들은 노아가 에녹 곁에서 일어나더니, 네모반듯하게 개켜두었던 흰 가운을 꺼내 입었다.

 

“새벽이니 슬슬 에녹은 자두는 편이 좋겠어요. 회복하는 데 잠만큼 좋은 약이 없거든요.”

“노아는요? 이 시간에 뭐 일하러 갈 것처럼.”

 

에녹은 시계를 돌아보았다. 뭐 예약 시간이라도 다 됐나. 돌아본 시계의 시침은 1을 가리켰으나 노아가 에녹을 깨운 시간이 오후 한 시였으니 지금 여전히 그 시간일 리는 없었다. 그럼 지금 새벽 한 시란 소리인데. 아무리 그가 수상한 손님까지 죄다 받는대도 새벽 한 시에 치과를 찾는 손님은 보통 예약이 아니라 응급이겠지. 에녹의 머리가 팽팽 굴러가는 와중 노아가 입을 뗐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아요.

 

침대에 누워 얼룩진 천장을 멍하니 보았다. 저 남자 성미에 이런 일 가지고 허세 부리거나 거짓말할 리는 없겠고. 그럼 정말로 조직을 나갈 수 있게 도와주려고? 근데 그런 일들이 이렇게 쉽게, 불시에, 대뜸 일어날 수가 있나? 와중에 이불을 바꿨는지 어제 덮고 잤던 것보다 더 무거웠다. 비싸 보이는 자수도 들어갔다. 손끝으로 이불에 꿰인 자수 실을 더듬다 에녹은 독백했다. 이 사람 진짜 취미로 여기 사나 봐….

 

11.

에녹은 오랜만에 옥상에 올라갔다. 기다리는 사람 없이 가기는 처음이었다. 노아는 그를 막지 않았다. 아래에서부터 요란한 음악 소리와 사람 떠드는 소리가 올라왔다. 성채에선 종종 불시에 음악회가 열리곤 했는데, 오늘이 그날인 모양이었다. 에녹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탁 트였으나 날은 흐렸다.

십오 층. 이 위는 곧장 활주로로 이어지는 하늘길이었다. 아무리 제멋대로 덧붙이고 이어 붙인 건물이라지만, 성채의 대가리는 이제 더 높아질 일이 없었다. 이 이상 올렸다간 비행기와 이마를 부딪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 경우 인간만 극도로 손해다. 에녹은 다리와 허리를 비틀어가며 걸었다. 옥상을 산책하려면 그런 식으로 피해 가야 할 방해물이 많았다. 이를테면 널어둔 빨래, 하늘을 향해 치솟은 안테나, 더러운 개장과 다 낡은 새장, 도박을 위해 길러지는 날짐승들과 책걸상 같은 사물들. 에녹은 그새 지저분해진 책상 표면을 쓸다가 좀 울었다. 그는 문득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망가진 건 없었지만 모든 게 멀쩡하지 않았다.

 

이제 홍콩 느와르 스태프 롤엔 에녹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 정말로? 그런 일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뤄질 수도 있다고? 당사자가 알지도 못하는 과정을 거쳐 그렇게 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믿기지 않았다. 아마…기뻐서 그런 걸 거야. 그래. 평생 그렇게 되기만을 염원해왔잖아. 에녹, 뭐가 문제야. 아버지는 이제 찾아오지 않으실 거야. 그러기로 약속받았잖아. 그랬다잖아. 아, 믿기지 않아. 내 인생이 드디어 내 것이라니 꿈만 같아. 왜냐하면, 어쨌든 이제 대포를 유의미한 물건이라 여기는 자는 전멸하지 않았는가. 대포뿐만이 아니다. 이 성채에 남은 모두가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이제는 누구도 대포가, 성채가, 옛 시대의 영혼과 도덕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

 

에녹이 책상을 잡고 우는 동안 노아는 뒤에 선 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12.

손목의 주저흔을 본 노아는 에녹에게 구피를 하나 사다 주었다. 사실 무언가를 키우는 일은 아주 힘들고 어려워서 시키고 싶지 않지만 에녹이 잘 해내리라 믿는다. 노아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그랬다. 에녹이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구피는 그럭저럭 잘 살았다. 홍콩은 온난하고 습윤한 국가이고, 구피는 열대어니까. 아니 사실 몇 마리인가 죽었다. 개중엔 금붕어와 플래티도 있었고 이번이 여섯 번째 물고기였다. 어쨌든.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래도 종일 갇혀 지내는 연인이 더워할까 싶어 노아는 여전히 선풍기를 틀어두었다. 혹시 고장 난 덴 없는지, 쪼그려 앉은 채 버튼을 하나하나 눌러보기도 했다. 에녹은 그 옆에 바투 앉아 노아의 가운 끝자락만 겨우 잡았다. 하고 싶은 말이 혀끝까지 올라선 표정이었다.

 

“안 가면 안 돼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안 돼요. 내가 발로 뛰어줘야 밉보이지 않거든.”

“하지만…나간 사이 만약 삼합회가 들이닥치기라도 한다면.”

“그럴 일 없어요. 준 게 얼만데.”

 

그쯤에서 뭘 줬길래 그러냐고 물어보기라도 하면, 노아는 무조건 입을 다물었다. 오로지 침묵만이 답을 대신했다. 아무래도 그것만은 에녹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에녹 역시 일부러 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눈앞의 뺨에 입을 맞췄다. 잘 다녀오라는 뜻이었다. 그러면 노아도 사르르 웃으며 똑같은 방식으로 인사했다.

 

“박자에 맞춰 노크했으면 그냥 열어주세요! 무조건 나니까.”

“그러려고 노력해볼게요.”

“어제도 그렇게 말해놓고 안 열어줬잖으면서.”

“그건 그런데….”

“어휴, 풀 죽지는 말고. 나 진짜로 다녀올게요!”

 

에녹은 이제 노아가 보고 싶을 때면 구피를 본다. 하얗고 투명하고 얇은 꼬리를 가만히 지켜보자면 자연스레 노아가 생각났다. 그가 걸을 때마다 가볍게 흔들리던 가운이. 그리고 한때 자신이 바쁘게 넘기고 다녔던 책 페이지도. 근데 그게 뭐 하는 책이더라. 떠오르지 않는다. 건망증은 요즘 에녹이 가진 가장 큰 문제다. 뭔갈 떠올리려고 오래 머리를 굴릴 때마다 목에서부터 열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여름이라 그래, 하고 짚어 넘겨왔지만 이제 음력으로 벌써 칠월 중순이다. 홍콩 역대 최고 기온은 진작 찍었고, 지금은 오히려 내려가는 중이다. 그나마 잠을 많이 자서 컨디션이 나쁘지는 않은데. 에녹은 둥근 어항에 제 뺨을 댄다. 매끄럽게 가공된 유리의 서늘한 표면이 피부에 닿았다. 어쩐 일인지 바깥이 조용하다. 아니 먹먹한 것 같기도 하다. 어릴 때 깨진 무릎으로 절뚝이며 들어간 기도실 내부처럼. 묵주 떨어지는 소리만 들리던 성당 안쪽처럼.

그나저나 날이 상당히 덥다. 오늘 며칠이지.

몸을 일으켜 달력 앞으로 걸어간다. 음력 칠월.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숫자마다 작게 쓰인 기념일을 하나하나 훑기로 한다. 줄을 그어가며 속독을 돕던 에녹의 손끝이 중간에 멈춘다. 맹란절. 이게 뭐더라. 뭐 하는 날이더라. 아 또 머리가 아프다. 에녹은 더는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