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주 오래
@삼번국도

1.

세계가 구성되기에 닷새는 약간 모자라다. 창세기 이전의 이야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페레즈의 역사를 되짚을 때다.

이 저택에는 이름이 따로 있더랬다. 누가 뭐래도 지도에까지 표시될 정도의 크기니까. 규모를 생각하면 그럴만 했다. 셰익스피어가 즐겨 썼다던 단어를 자랑스레 넣은, 언어적으로 사치스럽던 그 칭호는 한때 마을에서도 유별나게 돋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도 그것이 가졌던 눈부신 역사의 증명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 땅에서 있었던 불온하고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이제 이렇게 속삭인다. 그 저택 That mansion.

 

그러므로 ‘그 저택’이 매물로 올라왔다는 정보는 태초의 주말에 어울릴만한 가십거리였다.

 

2.

아이러니하게도, 삿된 소문이 퍼지는 중심지는 교회다. 제대로 된 읍내랄 게 아직 없는 마을에서 종교는 거의 유일하게 사교 활동을 가능케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도 대화는 조각보를 붙여 만든 퀼트 담요처럼 띄엄띄엄 이어졌다. 누구도 그 집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바가 없는 탓이다. 교회 구석에 응어리진 무리가 고개를 숙이고 불길한 참속을 뱉었다.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지을만한 표정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화두에 ‘그 저택’이 오른 이상은.

 

존 그레이, 18세, 학생

마을에 하나씩은 있는 법이죠. 저주받은 집 말이에요. 할로윈만 되면 거길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내는 어린 애들이 줄을 섰죠. 저도 그랬었고. 그치만 열다섯 살 땐가…. 친구들을 기다리며 담장에 얽힌 덩굴장미 대가리를 뚝뚝 뜯어내는데, 위에서 시선이 느껴졌어요. 명실상부 저택으로부터였죠. 오싹한 기운에 고개를 들었더니, 화창한 아침이었는데…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그 집 내부는 온통 시꺼멨어요. 그리고 온통 하얀 남자애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더군요. 눈이 마주치면 무언가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아 줄행랑을 쳤죠. 지금은요? (사이) 글쎄, 지금 생각하면 그 앤 제 또래처럼 보였고…. 듣기로는 걔네 부모님이 악마랑 내통했다고 마을 사람들이 꺼리던데. 안 된 일이죠. 까놓고 말해서 잘못한 건 부모지 자식이 아니잖아요.

 

리사 그레이, 10세, 어린이 합창단 단원

오빠, 그건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왜냐면 그 저택에선 유령도 나온댔거든! (존 그레이는 제 손을 잡은 리사를 내려다보며 쏘아붙였다. 뭔 소리야 그 집에서 사는 사람도 있는 마당에.) 왜? 사람도 사는데 유령이 살 수도 있지. 그리고 메이벨네 엄마가 그랬어. 그 집은 사람을 하도 잡아먹어서….(이후는 존 그레이에게 막혀 들을 수 없었음.)

 

벨 앤더슨, 58세, 주부

그 저택을 어쩔지에 대한 논의는 꽤 활발하게 이뤄졌었어요. 페레즈 가는 꽤 최근까지도 마을의 자랑이었거든요. 워낙 웅장하고 화려하다 보니 존재만으로 마을의 경관을 한 층 북돋아 주는 면이 있었어요. 내가 어렸을 때는 그 집이 이 마을 사교계의 중심이었고요. (사이) 뭐 이제는 다 옛말이지만. 남편이 그러는데, 그 집이 외관은 여태 멀쩡하긴 해도 예전의 멀끔하던 모습을 되찾으려면 꽤 오래 걸릴 거라고 하더군요. 이젠 애물단지죠. 관광지도 아니고 사택이다 보니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우리에게 없기는 하지만요.

 

피터 리즈, 32세, 마부

…그 집을 지나갈 때마다 말이 어찌나 불안해하는지 몰라요. 개인적으로 저는 악마니 뭐니 하는 비과학적인 현상보다는 그 집 부부의 아들에게 더 마음이 쓰이긴 합니다. 조실부모한 어린 애를 친척 없이 하인만 거느리고 혼자 자라게 하다니 명백한 아동 학대예요. 이제 스물이 넘었다고 들었는데 과연 잘 자랐을지 불안하네요.

 

3.

…그렇군요. 사람들의 말에는 죄다 그렇게만 대답하고 더 무어라 말 얹지 않았다. 오랜만에 교회에 들른 주일이었고, 안 그래도 사람들은 마가 끼었다는 집에 대한 첨언을 삼갔다. 대화에 낀 사람 중 하나가 나라서 유난히 그런지도 몰랐다. 내가 다시 페레즈의 가정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더는 없었으므로. 이야기가 나오면 나올수록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보고, 내가 사람들 눈치를 보는 미묘한 순환이 이뤄졌다. 저기요, 저라고 무작정 그 저택 좋아하진 않아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거예요 대체. 소용없겠지만 무슨 변명이든 무작정 내두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에녹 씨.”

“네에…?”

 

간신히 대화를 끝내고 교회 부지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려던 찰나였다. 고개를 돌리자 목사의 주름살 잡힌 얼굴이 전경의 가운데 놓였다. 뒤로는 희고 소박한 교회를 둘러싼 풀밭이 펼쳐졌다. 전부 (목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단정하게 정리된 잔디, 양식으로만 그 연로함을 엿볼 수 있는 잘 정돈된 건물들, 평화로운 늙어감의 흔적. 노아의 집은 외적으로는 황량했고 내부로는 어른이랄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그 집에 얹혀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아….”

 

연즉 목사가 무얼 말하려는지는 나도 쉽게 알았다. 그 저택엔 악귀가 들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는 몰골이었다. 설령 유령이 없더라도 그만한 집에서 젊은 남자 둘이서 산다는 건 마을의 가십이 될만한 소문이었고, 목사는 그걸 걱정하는 것 같았다. 우리의 생활을. 정확히는 노아에게 ‘묶인’ 나를. 그러나 나는 입꼬리를 올려 목사를 안심시켰다.

 

“뭘 걱정하시는지는 알겠는데, 저는 노아가 그 저택을 처분하고 새로 집을 구하려는 과정을 돕기 위해 거기서 지내는 중이라서요.”

“아.”

 

거짓말은 아니다. 적어도 현재의 목표는 그랬으니까. 골각처럼 예민해진 신경으로는 나 하나만 겨우 허락받을 수 있었다. 원체 없던 하인마저 전부 쫓아냈고 다시 고용하지도 않았다. 관리를 필요로 하는 모든 방에 곱게 쌓이기 시작한 먼지는 이제 필연이었다. 내 집에 데려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거긴 반대로 워낙 좁아 나 혼자 살기도 꽤 벅찼다. 늙은 목사는 이 안전하고 온건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주 웃어주었다.

 

“가끔은 햇빛이라도 쐴 겸 교회에도 들러 달라고 말 전해주실 수 있나요?”

“그 애가 내켜 할진 모르겠는데…. 네, 노력해볼게요.”

 

그가 걱정하는 이유 알 것도 같아. 노아는 이제 겨우 스무 살이고, 나이에 비해 너무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 봄을 맞아도 흉흉한 소식은 끊이지를 않았다. 분명 걱정한 거겠지. 그는 노아가 어릴 때부터 저 교회의 강단에 서서 설교했더랬다.

 

4.

“아아, 그 목사님이요.”

“…노아.”

“네?”

“솔직히 나갈 생각 없죠.”

“……네.”

 

좌우간 노아는 숫제 시큰둥한 낯이었다. 내가 돌아와서 기쁜 눈치였지만 그 외의 일이야 심상하든 말든. 남 이야기를 할 땐 으레 그랬다. 표정에서 다 티 나는데 감출 생각은 없나. 한 번 크게 앓고 자리에서 일어난 노아는 수척했으나 어딘가 전과 달리 벅찬 데가 있어 보였다.

 

희고 둥그런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자 마시다 만 찻물에 파문이 일었다. 이제는 노아 혼자서도 곧잘 차를 타 마신다. 하인이 없어도 차는 꼭 응접실에서 마셨다. 우리 사이의 암묵적 규칙이었다. 이 분수에 맞지 않게 넓은 공간을 둘이서 점유할 생각은 없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일 인분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갔다. 사실 나는 더 넓힐 필요 없었고 일방적으로 노아에게 가사를 가르쳐주는 식이었다. 자기 방 스스로 청소하기. 조금씩 요리하기. 청구되어온 세금을 내기. 일 년 예산에서 잘못된 부분을 집어내어 올바르게 계산하기. 방증하듯 찻잔 둘과 찻주전자가 중앙을 차지한 테이블 구석으로는 내가 내준 숙제가 쌓여 하나의 산을 이룬 상태였다. 사실 숙제랄 것도 없고 그저 죽음을 변명 삼아 미루고 미뤄왔던 집안일을 하나씩 청산하는 것에 가까웠다. 당연히 이 무너져가는 저택을 부동산 시장에 올리는 일 또한 거기에 포함됐고.

 

“집을 비우기 전에 청소부를 대거 고용할 생각이에요. 정원사도. 팔릴만한 상태로 만들어야 하니까.”

“산책할만한 시간은 없겠네요.”

 

노아는 긍정 삼아 겸연쩍은 낯으로 소리 내 웃었다. 어릴 땐 패악을 부렸고 나이 들어서는 냉소를 걸쳤던 얼굴에 그런 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정 표현도 가능했다는 사실이 나를 낯선 기분에 빠뜨렸다. 노아는 알까. 아마 모를 거다. 스스로도 그런 표정이 지어진다는 사실은. 이런 저택에서 그런 사정을 가지고 쭉 살아왔다면.

 

“그래도 여유 생기면 꼭 선생님이랑 같이 산책할래요. 집 앞이라도.”

“그러든가요…. 꽤 기특해졌네.”

“말로만요?”

 

노아의 얼굴 근육이 얼른 움직였다. 그리듯 내려간 팔자 눈썹에 무얼 바라는 게 명명한 눈빛. 발 디딜 구석을 발견하고 앞발을 선뜻 내민 털 짐승을 자처하듯이. 그러면 나는 순식간에 먹먹해지고 만다. 처음 보는 무해하고 부드러운 생물이 알아서 손바닥 위에 올라와 주기라도 한 것처럼. 이런 건…정말로…익숙하지가 않아서. 쟤는 언제 저런 걸 다 연습을 했나.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국 시선을 피했다.

 

“……어…뭘…대체 뭘 어떻게 해주길 바라길래.”

“그렇게까지 당황스러워요…?”

 

분위기는 대번에 어색해졌지만, 별수 없었다. 이것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줘야 하니. 머리맡에서 동화책이나 읽어줬던 학생이 선생님한테 교태를 부리고 있으면 선생님은 당황을 할까요, 안 할까요? 치밀어오르던 질문은 간신히 삼켰다. 분명 알고 저러는 거다.

 

“내가 기억하는 노아는 대부분 열세 살의 노아니까요.”

“…그건 그만 잊어주시면 안 되나요? 저랑 선생님 사이에 있던 오해는 다 풀렸잖아요!”

“닷새가 칠 년을 이길 수는 없죠….”

“그리고 딱히 이상한 걸 요구할 생각은 없었어요. 저는 그냥 선생님이….”

“내가……?”

 

나는 말끝에 침을 삼켰다.

 

“…제 머리…쓰다듬어주셨으면 좋겠어서.”

 

물이라도 쏟은 양 이어지는 정적. 노아는 그 새 내 눈치를 보더니 급히 말을 덧붙였다.

 

“어릴 땐 한 번도 그래 주신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야 제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아니, 성격 탓도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거 하나 때문에 아무것도 못했던 건데. 그 시절의 어린 노아는 정말로 불뚝성이 심했다. 이제사 곱씹어보자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거지만. 가부간 못 쌓았던 정을 다 받아낼 듯 노아는 눈을 빠르게 두어 번 깜빡였다. 애원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할지 다 알면서 모른 체 하는 게 분명했다.

…별수 있는가. 부모를 원망하고 정 붙일 데를 스스로 난도질해야 했던 어린 시절을 이해하고 보상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나밖에 없었다.

 

“그거 하나 부탁하면서 그렇게 뜸을 들여요?”

“하하…. 그러게요, 조금 긴장했나 봐요.”

“괜히 긴장하긴. 그 정도는 못 해줄 것도 없는데.”

 

내 쪽으로 숙인 머리에 손을 얹어 쓰다듬자 자동 반사처럼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으로 반쯤 가려진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선생님, 하고 부르는 어조는 나직하고 조심스러워서 꼭 바라는 게 몇 가지 더 남은 사람만 같았다.

 

“선생님이 모처럼 나들이를 제안해주셨으니 하는 말인데.”

“나들이라고까지는 안 했는데….”

“아카시아 나무 있잖아요, 이제 그 주변으로는 꽃이 많이 피었어요.”

“아, 그래요?”

“네. 정원사와 벌목업자를 불러서 아카시아도 뽑아버리고 꽃과 잡풀들도 전부 제거할 예정이긴 하지만……. 선생님.”

 

경청하던 나의 태도를 보고서도 노아는 한 번 더 나를 호명했다. 일부러 그러는 거지. 자꾸 약하게 보이려고. 묻고 싶지만 그래봤자 샐쭉 웃어주기나 할 테지.

 

“…정원사는 언제 오는데요?”

“이틀 뒤요.”

“노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계획적이네요.”

“그럼요. 누구에게 배웠는데.”

 

글쎄 내가 가르친 기억은 없는데. 부러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지어내자 우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같이 가주시는 거죠, 산책 얘기는 선생님이 먼저 꺼내신 거잖아요.” 손가락 밑으로 흩어지는 머리카락 특유의 까끌까끌한 촉감과 미적지근한 체온. 헝클이듯 헤집어도 노아는 반항하는 일이 없었다. 앞으로도 없겠지. 문득 깨닫는다. 난도질당하고 헤집어진 어린 시절을 설혹 다른 누군가가 보상해줄 수 있노라고 손을 들어도 그게 내가 아니라면 노아는.

 

5.

위엄 있고 사치스러운 방식으로 사생활을 보장해주는 이 저택의 단점은 딱 하나였다. 물을 받아 마실 수 있는 주방과 침실 사이의 거리가 지나치게 멀다는 것. 이사를 준비하느라 사용인들을 전부 해고하고 난 밤이면 특히나 더.

 

서쪽 복도로는 빛이 들지 않는다. 원래라면. 그러니까 희부옇게 보이던 그것은 달빛이 아니었다. 나는 멍하니 물잔을 들고 서서 융단을 덮어 흉측한 연대기를 겨우 가린 복도를 들여다보았다.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아플 것을 알면서도 자해를 하는 사람처럼. 클리셰 공포 소설 같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때의 행동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복도에 선 불투명한 형체를 가만히…쳐다보면 그건 꼭

 

매달려 죽어간 시체의 형상을 닮아서.

 

타락의 역사는 짧았지만 그만큼 자극적이었다. 아직도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페레즈, 라고 하면 아닌 척 이목을 집중했다. 평화로운 동네의 몇 안 되는 구경거리니까. 할로윈이면 찾아가는 담벼락의 주인이 그들이니까. 교회에서 들었던 소문이 고막을 웅웅 울렸다. 왜냐면 그 저택에선 유령도 나온댔거든. 거기서 악마와 내통한 부부가…. 수많은 꺼림칙한 소문을 지나쳐 마침내 목사의 평화롭던 얼굴을 생각하자 그제야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 주님. 나는 발길을 돌렸다.

 

침대에 누워서도 잠은 오지 않았다. 몸이 풀리고 나자 화가 났다. 아닌 새벽에 잠이 깨서 이대로 밤을 새우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씨발 나더러 뭐 어쩌란 거야. 내가 제물 바쳤어? 침대 시트에다 대고 발길질을 한참 하고 나니 진이 빠졌다. 느리게 호흡했다. 분노로 거칠어졌던 숨을 고르며, 당연한 수순처럼 노아를 생각했다.

노아는 ‘저것’을 본 적이 있을까? 의연하게 지나쳤을까? 나처럼 시선이 묶여 오래 쳐다봤을까. 거기서 부모의 죄목을 발견했을까. 소문 대신 저주를 들었을까. 저건 애초에 뭘까. 지난 날의 희생양? 후손의 어리석은 결탁을 원망하는 조상? 이 음습한 공기에 그저 끌려나온 환각? 그만큼 시간이 지났어도 아직 스무 살인 애를 붙잡고, 칠 년 내내, 이놈의 집구석이란 건 도대체가.

 

그래.

뭐 어쩌라고, 이제 걘 나랑 도망칠 건데. 도망쳐서 우리는 아주 오래 잘 먹고 잘 살 것이다. 충동적으로 뱉었다. 잠에서 갓 깬 사람답게 형편없이 막힌 목소리가 나왔다. 당황스러웠지만 내뱉고 나니 기분이 나았다. 복도 한가운데 선 망령 따위와 토론을 해서 이겨봤자 이득은 없는데도. 허공에 주먹질 해대는 거나 마찬가지인데도. 이상하게도 그랬다.

 

6.

“정원사가 여길 봤다가는 눈물부터 흘리겠는데요.”

 

처음으로 정원을 제대로 둘러본 나의 감상은 그랬다. 옆에서 보폭을 맞춰 걷던 노아는 문제의 그 표정(쑥스러워하는!)을 지어 보인 채 웃기만 했다. 어제 마주친 유령에 관해 이야기할까 하다가 나는 그만 관두었다. 그깟 게 나온다고 해서 집 매매를 포기할 수도 없고 노아를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화창한 대낮에 생각해보건대, 유령은 이 일대에 우악스레 핀 잔디만도 못한 문제처럼 느껴졌다. 비가 온 다음이라 그런지 잡초들이 평소보다도 싱그러웠다. 저걸 다 뽑고 가야 하는 입장으로선 징그러워 보일 뿐이었지만. 좁쌀 같은 노란 꽃과 손톱만 한 흰 꽃이 무더기로 핀 자리에서는 능청스럽게도 봄 냄새가 물씬 풍기기까지 했다. 여기가 만일 동네 뒷산이었다면 걱정 없이 즐겼을 텐데.

 

“이건 거의 묏자리 수준이잖아요.”

“그, 그래요? 선생님이 보기에는 그런가요?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살아온 사람이 느끼기엔 그럴 수도 있겠죠.”

“으음…. 정원을 다듬을 일이 없다 보니.”

 

나는 앤더슨 부인의 증언을 떠올렸다. 한때 마을의 구심점이나 다름없던 이곳은 이제 외곽이고 뒷마당이다. 죄수처럼 갇힌 노아와 함께 그렇게 됐다. 우리가 멈춰선 곳엔 구부러진 각도로 멎은 아카시아 나무가 있었다. 감히 자란다, 는 표현을 쓸 수는 없을 테다. 죽어간다고 하면 또 모를까. 하나의 나무가 이만큼 거대하게 자라려면 대체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하나. 얼마나 아득한 계보가 이어져야 하나?

 

“같이 살 집은 이렇게 큰 마당은 없을 예정이에요. 조그만 뒷마당 정도는 있겠지만.”

“…그렇군요.”

“방도 그렇게 많지 않을 거고요. 어차피 둘이서 살 거잖아요.”

 

괜히 뿌리 근처에 핀 클로버들을 툭 구둣발로 쳤다. 응당 얌전한 대답이 들릴 거로 생각했는데 돌아온 노아의 말끝은 의문형이었다.

 

“정말 둘이서 사나요?”

“내가 그런 거로 거짓말 안 한다는 거 알면서 굳이 물어보기는.”

 

노아가 내 손목을 잡았다. 압화를 다룬대도 그만큼 조심스럽진 않을 거였다. 나는 만져도 부서지지 않는데. 여유가 생긴 그는 그렇지 않을 때와 비교하면 거의 딴 사람 같았다. 목을 조르고 어깨를 쥐어짤 땐 언제고, 지금은 저렇게나 깨지기 직전의 그릇처럼 불안정한 낯으로.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신다는 게 아니라, 저는 그냥 실감이 안 나서….”

“이해해요.”

 

‘바깥’의 모두가 한때는 페레즈를 헐뜯고 노아를 동정했다. 그것도 어릴 때나 가능했지. 세간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적은 수의 사용인을 고집하는 노아를, 이제는 다들 미쳤다고 생각했다. 이 집의 주인답다고. 잘못된 인생처럼 기울어버린 아카시아 나무, 한낮에도 어두운 창문 안쪽, 유령이 나오는 복도. 노아는 이미 ‘그 집’의 부산물이 됐다. 동정의 대상이 나로 옮겨졌으니까. 제자 하나 잘못 두어서 억지로 때늦은 가정 교사 흉내를 내는 그 남자 That man. 여기 있다 보면 ‘그 집’과 ‘그 남자’로 묶여 다만 함께 썩어갈 뿐이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노아가 잡은 손을 들어 보였다. 언제 그렇게 나 모르게 자랐는지, 손은 내 손목을 한 바퀴 감고도 한 마디쯤이 남았다.

 

“이제 꽃에 대해 배울 시기는 지났잖아요. 다른 걸 가르쳐주려고 해요. 나는 여기서 함께 썩어가려고 머무르는 게 아녜요.”

“….”

“노아가 직접 나오도록 하세요. 여기서.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7.

아카시아 나무 아래를 가리키며 저 꽃들이 바로 점을 볼 때 쓰는 마거릿, 라고 노아는 말했다. 처음이었다. 노아는 늘 내게 꽃말과 쓰임새를 가르치도록 종용했으니까. 배우기 위해 지시하는 태도는 아니었지만. 하여튼 이제 겨우 자라 엄지만 한 크기로 핀 꽃을 꺾어 보여주는 노아는 사뭇 낯설었다.

 

“선생님, 꽃점 본 적 있나요?”

“소꿉놀이한답시고 풀 으깨고 흙 뭉칠 무렵에는요.”

“흐음.”

“…노아는요?”

“옛날에는 가끔. 저 나무 살아있던 동안엔 다른 꽃들이 도통 필 생각을 안 했으니 자주 할 수 있는 놀이는 아니었지만요.”

 

마거릿을 손안에서 굴리는 노아. 손짓에서 숨길 수 없는 생경함이 묻어났다. 꽃잎 뜯으면서 내 생각했어요? 질문이 목울대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삼켰다. 꼭 제가 오래간 햇빛을 보지 못한 꽃이라도 되는 듯이, 바라보는 얼굴엔 기이한 감회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단단히 둘렀던 껍질이 뜯겨나간 뒤의 그는 그렇게나 약하고 어렸다.

 

“이사를 가면 꽃을 좀 심을까요, 선생님? 뒷마당 정도는 있다고 하셨잖아요.”

“잘 기를 수 있겠어요?”

 

아, 노아가 웃는다.

 

“지금이라면요.”

 

희고 가는 손가락이 마거릿의 꽃잎을 하나씩 땅에 떨구었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한다. 노아의 입이 꾹 다물려 있었으므로 나는 대신 속으로 셈했다. 노아는…그는 이제 계산하지 않을 테다. 더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름이 있는 저택. 닷새의 그늘진 역사. 사람을 잡아먹고는 천연덕스레 위용을 자랑하는 가구들. 노아는 뿌리를 저버리고 자라날 것이다. 나는 우리 앞을 가로막은 나무의 흉하게 드러난 뿌리를 보며 다짐했다. 이 빌어먹을 망령들에 언제까지고 붙잡혀 살 수는 없다고. 그러도록 놔둘 수는 없는 법이라고.

 

꽃을 말려 죽이기 전에 선인장부터 길러봐야 하는 건 아닐까 싶네. 내 농담에 노아는 소리 내 웃었다.

 

8.

정원을 돌아보고 온 날엔 꿈을 꿨다. 처음이었다. 갑작스레 정해진 이사를 감당해내느라 낮 내내 시달리고 나면 어김없이 기절처럼 잠이 들었으니까.

페레즈 가의 삼 분의 일도 채 되지 않는 소박한 크기의 주택에서 둘이 사는 내용이었다. 노아는 꿈에서도 집안일이 서툴렀고 내가 사 온 꽃은 자꾸 절반 정도는 시들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꾸준히 꽃에 영양제를 주었고 노아의 일과엔 식물에 물 주는 일이 포함됐다. 깨진 접시는 치웠고 너무 탄 음식은 버렸다. 그러고 나면 새로운 식기를 사들였고 다른 레시피를 도전했다. 우리는 끝없이 실패했고 그 뒤로는 새롭게 시작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제 이 집의 낡고 음험한 부분을 뜯어고치기 위해 고용한 업자들이 올 테니까. 그리고 이틀 뒤엔 정원사들이 오기로 되어있다. 그런 식으로 점차 이 집을 떠날 작정이었다. 모든 어두운 계보와 역사를 지우고.

닷새는 그렇게 일주일이 된다. 우리는 아주 오래 그다음 날짜를 손꼽아 셈하며 살아갈 것이다. 살아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