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쁜 기적으로
@삼번국도

1.

그 일이 있고 난 뒤 노아는 확신했다. 이제 낙원은 없다. 이제 인류는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 코페르니쿠스와 니체가 신의 대가리를 깼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산산이 조각난 정수리를 목도한 바 없다. 터널 비전. 그들에게 신은 터널 밖에 있음으로.

노아는 신경질적으로 펜촉을 잉크병에 처박았다. 시꺼먼 액이 한두 방울 책상에 튀었다. 앞에 앉은 남자가 어깨를 떨었다. 맨필드 자작. 제대로 된 영지도 물려받지 못하고 다만 집안에서 두 번째로 가진 자작위를 승계했을 뿐인 젊은이였다. 심약해 보이는 몰골이 시작부터 영 호감 상은 아니었다. 아니 까놓고 말하자. 노아는 그가 언짢았다. 기사 이상의 작위를 가졌다면 누구든 에녹을 알아볼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노아는 구태여 그의 시중을 위해 임시 집사까지 구해야 했다. 두 명 이상은 고용하고 싶지 않아 먼지 쌓인 응접실의 문을 잠그고 일부러 집무실로 직접 불렀다. 그게 무슨 효과를 낸 건지 자작은 어둡고 엄숙한 분위기로 설계된 이곳에 꽤 주눅이 든 모양이었다.

“사생아를 숨겨주고 있다더군요.”

심지어 그가 입을 연 뒤 분위기는 한 층 더 험악해졌다. 누굴 말하는지는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노아는 아예 펜을 내려놓았다. 집무실은 위압감을 위해 부러 등지는 방향으로 커다란 창을 내어두었다. 자작은 그 위압감에 지나친 영향이라도 받는지 노아의 행동 하나하나에 쉬이 소스라쳤다.

“예, 그런데요?”
“듣자니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 경께서 하인으로 고용을 하게 됐다고……. 거기다 그를 제외한 모든 하인을 해고하기까지 하셨다지요.
“….”
“어떤 이유가 있건 간에, 경다운 조처는 아니라고 봅니다.”

맞잡은 손이 덜덜 떨리는데도 할 말은 다 했다. 노아는 턱을 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자작은 미처 거기까지는 신경이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맨필드씨. 나 알아요?”
“예?”
“나 아시냐고요.”
“아, 아…알고 말고를 떠나 이건 넓게 보면 왕실의 권위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동으로까지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자’가 태우고 간 것 중에는 여왕 폐하께 진상되는 물건도 포함되어 있었다고요. 증언이 가능할 수도 있는 사람을, 숨겨두는 건….”
“에반은 목숨을 지키려고 우리 집에 왔어요. 나랑은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고, 용의자의 손에 죽을 것이 두려워 제게 온 겁니다. 사생아라 그 집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운 좋게 대처할 시간을 벌었던 거고요. 그러니까 그 집에 관한 일은 하나도 모릅니다.”

당신 같은 작자가 오리라고 언젠가 예상은 했지. 노아는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줄줄 읊는 목소리에서는 일말의 염증까지 느껴졌다. 자작은 멍하니 말을 들으며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훔쳤다. 덜덜 떠는 행태를 봐서는 혼자서 십일월에 선 것 같은데. 노아는 다시 펜을 들었다. “할 말 다 했으면 가보세요. 저는 당신 말고도 처리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대놓고 축객령을 내리자 자작도 별수 없었다. 실례했습니다. 별로 실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얼굴로 형식적인 인사를 뇌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시로 고용한 집사가 그의 뒤를 따랐다.

이어 방에 들어온 사람은 에녹이었다. 흑백으로 간단히 이뤄진 유니폼을 입은 채로 문가를 발끝으로 괜히 문댔다. 그를 보자 노아의 표정이 삽시간에 풀렸다. 여태 한 글자도 적은 일 없는 만년필만이 괜히 또 책상을 굴렀다.

“노아.”
“대화 들었어요? 미안, 거절하고 싶었는데 워낙 막무가내라.”
“괜찮아요. 그것보다…….”

에녹은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노아는 일어나 널따란 방을 가로질러 에녹을 안고 토닥였다. 그놈이 허튼소리 한 건 잊어요.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달래도 품 안에서 눈을 끔벅인다. 그 사람, 로베르 백작이 불렀을 때 봤어요. 마침내 나온 정보는 놀랍지 않았다. 최근 들어 유달리 에녹의 거처를 알아내려고 하는 귀족이라면 에덴과 관련이 없기가 더 힘들지. 하지만 에녹도 그런 단편적인 기억만으로 맨필드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1+1이 2라는 사실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1+1이 3일 때부터 시작된다.

“용의자가 된 후로 여기 도착할 때까지, 신문을 끝없이 확인했어요. 경찰의 행보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니까.”
“….”
“…북부의 화재 사건과 나를 연관 지은 신문사는 단 한 군데도 없었어요.”

노아의 표정에서도 웃음이 사라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
서신에, 자작은 또 오겠다고 적었다. 그러고 진짜로 왔다. 그 상태로 사흘이 흘렀다. 에녹은 매번 자리를 피해야했고 노아는 집사의 계약 기간을 하루하루 늘렸다. 주는 돈이 많아서 가능한, 충동적인 연장이었다. 맨필드 자작의 태도를 봐서, 퇴짜라도 놨다가는 몰래라도 들어올 심산 같았다. 귀족으로서의 명예와 질서를 중히 여기는 자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구차한 각오였지만. 그만큼 자작은 간절해보였고 미쳐보였다.
이렇게 되면 불리해지는 쪽은 노아와 에녹이다. 에녹이 ‘에덴’과 관련된 사업을 했다는 정보는 일찍이 암암리에 귀족들 사이를 떠돌았다. ‘에덴’이 어떤 과일인지가 아직 퍼지지 않았을 뿐. 그리고 그건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됐다. 맨필드 자작은 그 저주받은 과일을 나누어 먹었다는 사람 중 유일하게 아직도 ‘에덴’에 집착했다. 왜, 불에 바싹 구워진 에덴이라도 처먹고 탈이 났나 보지.

좌석에 앉자 코트 안쪽에 찬 권총의 묵직한 양감이 척추를 타고 느껴졌다. 그뿐만 아니라 주머니에는 성냥갑이 있었다. 목적성이 명명했다. 에녹에게도 혹시 몰라 단도를 쥐여주었다. 자기방어를 하라는 뜻이었다. 살인은 이미 저질렀고, 고생도 너무 많이 했으니까. 마음 같아선 에녹을 두고 오고 싶었지만 맨필드의 목적이 에녹인 이상은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차라리 데리고 다니는 게 낫겠다는 결론까지는 고민을 거칠 필요도 없었다.

‘에덴’은 필연적으로 더 많은, 더 고귀한 숙주를 요구했다. 과연 영리했다. 하필 사람에게 기생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지. 인간에게 꼬리 치는 개조차 피 맛을 알면 사살한다. 하물며 조금 더 달콤할 뿐인 과일에 너그러울 리 없다.

에녹은 이제 햇빛을 증오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이 훤히 드러나서도 안 되었다. 노아가 왼편 창문을 커튼으로 덮자 기하학적인 무늬가 빛을 가렸다. 맞은 편에 걸터앉은 에녹은 오랜만에 갖춰 입은 차림새였다. 얼굴의 절반은 족히 가리도록 조금 큰 사이즈로 고른 실크 해트. 금색 안경. 거기다 이제는 펼친 신문에 고개까지 박았다.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노아에게도. 그건 좀…기분이 묘했다.

“그렇게까지 감출 필요는 없어요. 객실 안이고 커튼도 쳤잖아요.”
“혹시 누가 창문으로 보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그럼 내가 안아서 감춰줄까….”

신문이 내려간다. 미간에 잡힌 주름이 그늘 안에서도 선명했다. 진심인가요. 따져 묻고 싶어 하는 마음이 흘러넘쳐 발을 적실 지경이었다. 노아는 두 손을 들었다. 농담이에요.

3.
집엔 심리학 책이 많았다. 관심이 있어 모았다기보다는 단순히 집무실의 높은 천장고를 채울 수단에 가까웠다. 사놓고 보니 제목이 흥미로워 펼쳐본 게 대부분 심리학과 관련됐을 뿐. 개중에는 사랑과 관련된 이론서도 꽤 있었다. 연애 결혼이 거대한 환상과 함께 사교계를 한창 이끌 무렵이었다. 고리타분한 충고의 자세를 지킨 글귀의 요지는 대부분 다음과 같았다. 사랑은 사람을 모방하게 만든다. 평생 해본 적 없는 일을 경험케 하는 경이의 성질을 갖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에게 너무 목을 매지 말 것, 상호 존중의 태도를 유지할 것, 적당한 거리감을 지킬 것. 자연스러울 수록 국소적인 범위의 기적을 통해 연인은 서로를 닮아간다. 노아는 연인과 사랑에 대해 직언하려는 모든 책을 골라모아 폐기했다. 선악과에 입을 대지 말라 할 게 아니라 나무를 아예 잘라버려야지. 뿌리채로 뽑아버려서 불필요한 지혜는 굳이 베어물지 못하게 해야지.

여관에 짐을 풀고 나니 새벽이었다. 달빛조차 비치지를 않았고 공기 중이 영 텁텁했다. 빨리 빨리 돌아오세요, 수배 중인 범인이 아직도 잡히질 않았대요. 데스크를 지키던 주인이 선의로 건넨 말에 노아도 웃으면서 고개를 주억였다. 그 범인이랑 같이 손 잡고 사람 죽이러 가는 길이라고는 굳이 말 안 했다.
노아는 꾸벅꾸벅 조는 에녹의 머리를 제 어깨에 놓은 채 곱절의 값을 치르고 마부에게 얼룩진 쪽지를 보여주었다. 23 오크험 웨이 스카버러. 마차는 수없이 덜컹거렸고 에녹은 결국 잠에서 깼다. 해가 져도 구름이 짙어도 모자를 벗지 않는 게 신사의 매너. 노아는 처음으로 허례허식에 감사했다.

맨필드 백작가의 주소였다. 컨트리 하우스 뒷자락을 장식하는 정원의 일부를 과수원으로 갈아엎는다고 했지. 교외의 백작저에서 그만한 공사를 하면 어디서 무엇을 사 오는지의 출처가 명확하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목재와 대리석과 조각상 따위를 제하고 정작 중요한 묘목은 구매처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사과나무를 몇 그루 사기는 했다지만 숫자가 지나치게 적었다. ‘에덴’의 존재를 알자 그것이 되려 연막처럼 느껴졌다.

사교 기간인데도 맨필드 자작은 웬일로 런던의 손바닥만 한 아파트 대신 백작저에 머무른다고 했다. 혼기 찬 나이에 별안간 두문불출이라니, 구설에 오르기 딱 좋은데. 사람을 해하려면 그 정도 엉성한 각오로는 안 되지. 노아는 고개를 돌려 창 너머로 스치는 나무의 윤곽을 헤아렸다. 맨필드 백작은 철마다 사냥을 즐겼다. 이제쯤이면 이 근처를 다니는 짐승은 웬만하면 박피 되었을 무렵이다. 등에 배기는 총의 감각을 노아는 복기했다.

어떤 어둠은 맹목으로 가는 길이 된다. 에녹, 그러게 왜 에덴을 선택했어요. 당신의 신이 여기 있는데 왜 다른 탈출로를 꾀했어요? 남의 교리를 그렇게 쉽게 읊으면 안 되지. 그래도 뭐라고 안 할게요, 에녹이 제일 힘들었을 테니. 발음 없이 입속으로만 연인을 고해해주다 문득 직접 밟아 죽인 작은 목회자를 떠올리자 눈빛은 삽시간에 빛이 아니게 된다. 노아는 짓씹듯 읊조린다. 십자군이 왜 이백 년을 갔는지 모르나.

4.
맨필드 백작이 유서를 위해 고용한 변호사와 조수, 라는 말을 마부는 금세 믿었다.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사용인이 아니니까. 오랜만에 사람 앞에서 고개 숙여 인사한 노아는 에녹의 손을 잡고 소리 죽여 걸었다. 대문이 아닌 저택 뒤쪽을 향해서. 농담과 미소가 줄었다. 에녹은 모자를 푹 쓴 채 끌려가듯 두어 걸음 뒤에서 노아를 따랐다.
저택을 따라 가로로 길게 이어지는 과수원엔 문이 없었다. 기이하게 화려했지만, 오히려 그 장식적인 면모가 기존의 정원과 어울려 마치 일부인 양 자연스러웠다. 집안의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어지간히 애를 쓴 모양이지. 노아는 혀를 찼다. 어둠에 묻히도록 짙은 갈색을 띤 나무가 드문드문 있었고 발을 옮길수록 덜 자란 흰 묘목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들 곁에는 잠든 어린 양처럼 무구하게 눈을 감은 맨필드가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굳이 확인할 필요 없이 자작일 터였다. 동시에 같은 걸 봤는지 에녹이 코트 소맷부리를 잡아당겼다. 노아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걱정하지 말란 뜻이었다. 그래도 에녹은 영 마음이 놓인 낯이 아니었다.

숙주는 어차피 죽여야 했다. 맨필드 자작의 상태를 생각하면 억지로 토해내게 하는 방법도 아직은 가능할 거였다. 하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저자는 에녹이 아닌데….
노아는 에녹을 네 걸음 정도 뒤에 미뤄두고 총을 꺼냈다. 나머지 손은 성냥갑을 쥔 채 주머니 안에 찔러넣었다. 유약을 발라 구운 흰 자기 같은 손가락이 트리거에 매끄럽게 감겼다. 미리 장전해둔 상태였고, 발포만 하면 됐다. 암기하듯 속삭였다. 심장에 한 번, 목에 한 번. 쏴도 아무도 모르겠지.

기이하게도 총소리보다 목소리가 먼저였다. 노아, 뒤!

5.
순식간이었다. 드러누운 남자의 가슴팍이 오르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목덜미로 한기가 덮쳐 들어왔다. 잘 일군 기름진 땅에 총이 힘없이 떨어졌다. 벌써 머리 가슴 배를 나누어 자라기 시작하는 흰 피질 사이로 겨우 몸을 뒤집은 노아가 쓰러졌다. 헐떡대는 숨이 얼굴로 쏟아졌다. 불현듯 노아는 맨필드 자작의 이름을 떠올렸다. 애덤 맨필드. 미친놈의 정신머리가 이름을 따라가는구나. 목에서 시작한 체온이 가슴팍으로까지 한기를 뿌릴 것만 같았다. 노아는 이 온도를 기억했다. 잊을 수가 없지. 맨필드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이번에 달려드는 사람은 에녹이다. 당황해 칼을 칼집에서 빼내야 한다는 생각도 못 했는지 뭉툭하고 단단한 칼집 끝이 맨필드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타격이 있었는지 허리가 비틀렸고 손에 힘이 풀렸다.

“이 빌어먹을 배신자, 너도 함께 왔구나! 제 발로 걸어서!”
“배…배신이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

말을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맨필드의 한 손엔 어느새 삽이 쥐어졌다. 에녹은 그만 입을 다물고 눈을 깜빡였다. 저게 어디서 났지? 둘 다 화려한 장식과 흰 나무껍질에 눈길을 주느라 자세히는 미처 살펴보질 못했다.

“너는, 너는 특별히 용서를 못 하지. 에녹, 그래…. 네놈은 이 성목(聖木)을 기를 지반이 못 되었어! 로베르 백작이 기회까지 주었는데도!”

성목? 캑캑대던 노아가 황망히 맨필드의 단어 선택을 곱씹었다. 신앙이 거름망으로써 아직 가치가 있는지는 차치하고, 애초에 ‘에덴’은 사업의 일종이었다. 성경의 매력적인 네이밍 센스를 약간 따랐을 뿐.

“신실하다기에 모두가 널 믿었는데, 믿었는데…….”

맨필드의 광기는 숭배로까지 이어진 모양이었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에녹은 맨필드가 분노하는 사이 칼집과 칼을 분리했다. 형형하게 홉 뜨인 눈깔이 잘 벼려진 칼날에 가닿자 우악스레 굴렀다. 삽을 들고 달려들었다. 지나치게 과열된 감정이 육체를 오히려 방해하는지 움직임은 단순했고 예상 가능한 범주에 있었다. 하지만 삽이, 그놈의 삽이 지나치게 길고 컸다. 과연 꽃이나 겨우 심는 모종삽과는 차원이 달랐다. 휘두른 삽의 끄트머리가 에녹의 팔을 스쳤다. 그나마 맨살이 아니라 비명은 삼킬 수 있었다. 하필 칼을 쥐었던 팔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때였다. 두 사람이 바닥을 구른 것은. 에녹은 그중 하나가 아니다. 노아는 남자의 등에 올라타 정확하게 치명적인 각도로 맨필드의 손을 꺾는다. 일말의 비명과 함께 쥐어짜이듯 삽이 강제로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나머지 손이 에녹의 발목을 잡는다. 연좌제로 복수할 것처럼 매서운 손놀림이다. 연즉 뺏어 든 삽이 바로 손등을 찍어 내리지만 않았다면 자국이 남았을 것이다. 감히 어딜 만져. 선언하는 목소리에 독기가 명명하여 생경하다.

6.
이제는 시간이 없었다. 기민한 사람은 이전의 소란을 계기로 벌써 밖에 나왔을지도 몰랐다. 목을 졸린 탓에 산소가 부족해 골이 울렸다. 더 피곤해지기 전에 노아는 갖고 온 캐리어를 거칠게 열어젖혔다. 옷가지며 세면도구는 미리 두고 나왔으므로, 안에는 오직 금속 재질의 통뿐이었다. 들어 올리자 안쪽에서 무언가 출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에녹도 노아가 뭘 계획하는지 금세 눈치챈 모양이었다.

뚜껑을 열자 지독한 냄새가 금세 과수원에 퍼졌다. 노아는 이제는 간간이 떠오를 뿐인 문구를 기도 대신 외웠다. 사랑은 사람을 모방하게 만든다. 평생 해본 적 없는 일을 경험케 하는 경이의 성질을 갖는다. 국소적인 범위의 기적을 통해 연인은 서로를 닮아간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모든 게 꼭 사랑만 같았다. 닮아가기 위한 기적의 모서리를 겨우 핥은 듯싶었다. 노아로선 일말의 환희마저 느꼈다.

불붙인 성냥 하나면 완성될 재난이 목전이었다. 그 전에 처리해야 할 게 있었지. 노아의 무기질적인 표정은 여전했다. 마치 방화의 기억을 이어받은 것처럼, 이상하게 침착했다. 오히려 떠는 쪽은 에녹이었다.

총구를 겨누자 애덤 맨필드가 끄으윽, 숨 새는 소리와 함께 흐느꼈다. 당신들, 당신들 두 사람, 지옥에나 떨어져라……. 그 말에 노아는 오랜만에 에녹 아닌 다른 자 앞에서 활짝 웃었다. 그 미소조차 결국엔 에녹에게로 수렴될 테니까.

“아…. 뭐, 그래요. 기꺼이.”

7.
맨필드의 과수원이 전소한 날, 비가 내렸다. 소나기였다.
기름으로 시작된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고 오히려 저택 쪽으로 옮겨갔다고 했다. 다행히 화재의 냄새를 맡은 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덕에 비교적 멀쩡할 수 있었다고.
이어 과수원에서 의도적으로 기름을 뿌린 게 분명한 흔적이 발견되어 신문엔 한 차례 맨필드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자작위를 이어받았던 차남 애덤 맨필드의 광신도적인 만행 역시 줄줄이 밝혀졌지만, 소문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애초에 그가 무얼 그렇게 믿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빈구석이 많았지만 과수원에 애덤의 짓인 게 분명한 시체가 하나 발견되면서 방화범 칭호도 자연스레 애덤의 것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전에 있었던 귀족 일가의 몰살 사건은 조금씩 낡은 논제가 되어갔다. 노아와 에녹에게는 다행이었다.

“에녹, 진짜 자요?”
“으응…….”
“자는데 대답을 어떻게 해요.”
“다 방법이 있어요.”

그러지 말고 밥이라도 먹자니까. 배 안 고파요? 노아는 팔베개를 베고 누운 에녹을 빤히 보았다. 여관의 침대 매트리스는, 당연하게도, 페레즈의 침대보다 딱딱하고 불편했다. 그나마 2인실 용이라 더 넓었으면 넓었지 좁지는 않았지만 그조차 딱 붙어 자느라 메리트가 되지는 못했다. 에녹은 짜증을 내다 머리를 기댄 노아의 팔에 뺨을 비볐다.

“지금 연 식당은 술집밖에 없던데 어떻게 지금 먹어요….”
“뭐 안주라도 조금.”
“됐구, 노아도 좀 잔 다음에 뭐라도 해요. 제일 힘쓴 사람이…….”

흐린 말끝에 규칙적인 숨소리가 자리 잡았다. 자요? 이번엔 대답이 없다.
일요일이었지만 둘은 교회에 가지 않았다. 성경은 다른 모든 건강한 책이 그랬듯 버려진 지 오래였다. 태울 걸 그랬나 그것도. 뒤늦은 발상이었다. 옆에 지친 듯이 잠든 에녹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헤집다가, 노아는 자세를 편하게 고치고 눈을 감았다. 모르겠고 일단 피곤하니까 자고 난 다음에 생각하자, 자고 난 다음에……. 두 사람의 이마가 맞닿았다. 사랑은 사람을 모방하게 만든다. 평생 해본 적 없는 일을 경험케 하는 경이의 성질을 갖는다. 국소적인 범위의 기적을 통해 연인은 서로를 닮아간다. 스카버러에서부터 따라온 듯 창 너머로 비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노아는 미소지었다. 기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