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이 임한 자리
@삼번국도

1.
머리카락을 말리고 나자 수건은 금방 차게 젖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텔레포트 써서 왔다고 했으면서 왜 이렇게 눈을 맞았어요?”
“답장이 이제쯤 오겠거니 싶어서, 받자마자 출발하려고 부엉이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답이 뭐 언제 올 줄 알구.”
“그러게요. 기다릴 때 와서 다행이었죠. 뭐!”

노아가 사람 좋게 웃어 보이자 에녹은 대답처럼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얼굴을 보고 대화하기는 참 간만이었다. 한동안 역마살이 붙은 양 돌아다녔으니 만날 수 있을 리가.
객실 벽 한 면의 절반을 차지한 창문 너머로는 눈이 내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옆에 걸린 종이 달력은 아직 8월에도 닿지 않은 상태였다. 모두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영국이 북반구에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았지만 동시에 기존의 상식으로 닥쳐오는 멸망을 독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또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영국에 얼마 남지 않은 인구는 죄 겨울옷을 꺼낼 시기였다. 텔레포트로 왔다지만 내내 바깥에 있었다던 노아 역시 두꺼워 보이는 니트와 헤링본 코트에 목도리로 싸맨 참이었다.

“천문대?”

질문형조차 아닌 질문. 에녹은 그가 무얼 묻고 싶은지 알았다. 그리니치까지 와서 천문대를 언급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였다. 에녹은 부러 엄격한 선생이라도 되는 듯이 목소리를 깔았다.

“안 갈 거예요.”
“엑, 진짜?”
“무의미하니까.”
“다른 거는요? 그러니까, 박물관 같은.”
“거기도 안 갈 거예요.”

의문도 잠시. 희미하게, 노아는 그를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를테면, 에녹은 부모의 부고를 들은 뒤 찾아갔던 그들의 집을 여태 기억했다. 테이블에 단정하지 못하게 올라간 머그잔과 소파 등받이에 대충 걸어둔 담요, 책상을 채운 잉크병과 깃펜과 종이 따위를. 아마 노아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가족의 집이 아니라도, 누구의 집이라도. 그들 앞으로 펼쳐진 세계의 질서란 요컨대 이러한 것들의 나열로 이뤄진 셈이다; 불그스름한 찻물이 찻잔에 담긴 채 그대로 식어가는 거실, 벗어둔 스타킹이 바닥에 엉망으로 어질러진 채 평생 그대로 굳어가는 안방. 그러니까 그런 곳은 이제 어디에든 있었고 굳이 갈만한 장소는 못 됐다. 거긴 이제는 그냥 무덤 같은 장소가 된 거다. 인간이 쌓아 올렸던 희망의 껍데기가 남은 묘지.

“그러면 어디 가려구요?”
“여행은 그냥 모르는 동네 돌아다니려고 하는 거지, 뭐 어딜 꼭 가야 하나….”

노아는 의자에 앉은 채 긴 다리를 허공에 휘적댔다. “에녹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아.” 말꼬리를 늘여 경탄처럼 들리는 답에 에녹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흘겨보기만 해도 넉살 좋은 미소에서 무언가 원하는 듯한 낌새가 비쳐 보였다. 그리고 그 낌새는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금세 에녹 앞에서 솔직하게 녹아내렸다. “나도 같이 돌아다녀도 돼요?” 당장이라도 디밀  듯이 가까이 다가온 얼굴. 푹 숙여 그늘진 이목구비의 단정한 형태. 빛나는 노란 눈. 에녹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만 굴려 명백하게 노아를 흘겨보았다.

“거절 못 할 거 알고 온 거 아녜요?”
“하하.”

2.
종말은 집 문턱으로까지 들이 닥쳐왔다. 8월의 뉴욕에 내린 눈, 12월의 일본 야마나시현에서 무더기로 핀 해바라기, 통계를 통해 0%에 가까워졌음을 알린 출생률. 이것들은 한때 우리 사회에 대서특필 되었다가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취급되는 것들이다. 우리는 그것을 대가라 부르지 않고 업보라 불렀어야 했다.
지구에서 인간을 비롯한 한 시대의 생물들이 절멸당하기까지는 앞으로 십 년도 더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발표된 바 있다. 덧붙여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이 현존하는 가장 친환경적인 기술만을 사용해 지구를 산업혁명 이전의 상태로 복귀시키기까지는 약 500년이 걸린다고 한다.
-제임스 허머트, 〈고립이 임한 자리〉, 1990 (이 책은 당시 세계 최후의 환경학 저서로 불렸다.)

3.
천문대는 고사하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잖아요. 노아는 정곡을 찔렸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얌전히 에녹을 따라 객실 복도로 나섰다. 런던 근처에 위치한 호텔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숙소는 넓고 깨끗했다. 옥상에는 루프탑 바가 있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은 운영하지 않았다. 직원은 가끔 돌아다녔지만, 활기랄 게 없었다.
2층 구석을 차지한 카페. 과일이나 채소를 사용하는 메뉴는 서너 개를 제외하고는 주문할 수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카페라고 원두는 남아있는지 커피 종류는 자유. 에녹은 모카와 라떼를 주문했다. 손님이 없어서 진동벨 대신 주인이 직접 가져다주는 서비스까지 받았다.

손님이 없어 절반만 켜둔 할로겐 등은 호텔 안쪽으로 침입해오는 어둠의 등을 겨우 떠밀 수나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양호한 수준. “이런 델 다 찾다니.” 라떼를 앞에 두고, 노아는 순수하게 감탄의 의미로 중얼거렸으나 설명을 요구한다고 느꼈는지 에녹이 마시던 잔을 내려놓았다. 무료한 손이 갈색 티슈를 만지작댔다.

“여행객 자체가 존재하기가 힘들잖아요, 요즘은…. 그래서 손님을 받을만한 수준이 되는 호텔 빼면 거의 다 망했더라고요. 뭐, 나한테는 이득이지만.”
“그렇네요! 소비자 입장에서는.”

창밖으로는 끝없이 하얀 부스러기가 쏟아져 내렸지만 풍경은 하얗지 못했다. 눈이 내리는 동시에 기온이 영하에 이르지 않은 상황은 실로 기묘한 풍경을 낳았다. 맙소사, 칠월에 눈이라니. 노아가 비꼬듯이 중얼였다.

“원래도 좀 쉬었다가 나갈 예정이었는데, 노아가 눈을 맞아가며 오기까지 했으니….”
“나 걱정해주는 거예요?”

티슈 끝을 배배 꼬는 손가락을 능청스레 흰 손등이 덮었다. 꾸민 듯이 과장되게 감격한 투였다. 그러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보란 듯이 내쉬는 한숨.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수건이 다 젖도록 눈을 맞은 사람을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그치만 안 그래도 에녹은 나한테 연락도 잘 안 하잖아요.”“음.”

할 말이 없는지 에녹의 말수가 대번에 줄었다. 노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거기다 답장도 이 주일에 하나 받으면 운 좋은 수준이고…. 세상이 안전한 것도 아닌데 맨날 돌아다닌다고 하니까 안부가 궁금해서 그랬어요.” 비위라도 맞추듯이 의도적으로 지어 보인 불쌍한 표정이었지만 에녹은 거절할 수 없었다. 손도 내치지 않고 있는걸.

4.
좀 더 파고들어 보자. 지난 10년간 242종의 육지 척추동물과 포유류 65종, 양서류 70종, 파충류 50여 종이 멸종했다. ‘침묵의 봄’은 지나친 지 오래, 이제는 여름에도 매미 소리 하나 들을 수 없는 일상이 당연해졌다. 연간 10억 배럴의 석유 소비와 평균 6,000미터톤의 이산화탄소 배출이 당연해진 인류에게 남은 길은 종 단위의 고독사뿐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지만, 앎만으로는 멸망을 늦출 수는 없다. 이제 자연이라는 단어는 오로지 박물관과 역사 교과서로만 접할 수 있는 개념이 됐다. 인간은 이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제임스 허머트, 〈고립이 임한 자리〉, 1990

5.
커피는 나름 맛있었지만 계속 머무르고 싶을 만큼 운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둘은 서둘러 객실로 돌아왔다. 카드 키를 꽂자 금세 환해지는 내부. 노아는 한 차례 진정한 다음에야 에녹이 머무르는 객실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작은 책걸상, 퀸사이즈 침대 하나, 그리고 간이침대에 가까운 소파 하나. 객실은 거대한 가구 몇 개만으로 들어찼다. 괜히 한 바퀴 빙 돌고 난 뒤, 노아는 소파에 기대 눕듯 앉아서는 들고 온 가방을 열었다. (물론, 여행객이 들고 다닐 만큼 큰 것은 아니었다. 그는 따지고 보면 불청객에 가까웠으므로)

“에녹 그러고 보니 곧 생일이잖아요.”
“곧? 한 달도 넘게 남았는데.”
“관점을 다르게 하죠, 관점을! 벌써 한 달밖에 안 남은 거라고요.”

책장을 넘기는 노아의 손을 에녹이 흘긋댔다. 제대로 된 짐도 가져오기 힘들어 보이는 저 작은 가방에서 책이 나왔다는 게, 과연 예언자 일보의 지면을 담당하는 사람답달까.

“그럼 미리 말해두겠는데, 생일 선물로 책은 별로예요.”
“어? 왜지. 싫어요? 이거.”

꽤 오래 베스트 셀러 자리를 차지했던데. 머글 기준이지만. 읽던 책을 펄럭이자 코팅된 표지가 반짝, 빛을 반사했다. 눈을 사로잡는 색으로 통일된 볼드체의 알파벳이 휘날렸다. 에녹은 여태 불퉁한 표정으로 식탁에 기대선 채로.

“그야 훑어보기만 해도 무슨 책인지 알겠던데. 참나…. 누가 썼더라, 후무스?”
“……허머트예요, 에녹. 제임스 허머트.”
“나도 알아요, 하여튼, 내용이랄 것도 없는 책이던걸. ‘인간은 그동안 저지른 잘못을 생각해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얌전히 멸종당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해서 나오니까.”

노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고 반박할 이유도 없었다. 제임스 허머트든, 존 도우든 세기말을 앞둔 머글들은 이제나저제나 죽을 날만을 손꼽아가며 제사를 지내기 바빴다. 이제 비관하지 않는 자는 마법사뿐이었다. 숭고한 희생으로 지구를 구할 생각을 뒷짐 진 손안에 남모르게 숨긴 채 살아가는.

6.
눈은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서 길거리의 꼴은 꼭 장마의 도중 같았다. 그리고 계절로 따지자면 장마가 올 시기이기도 했다. 영국은 원체 비가 많이 오기도 하고. 결과적으로는 어찌어찌 계절에 맞게 흘러가는 느낌도 있고. 공중에서는 고요하다가 바닥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 바깥을 보다가 노아는 그만 창문을 닫고 침대에 풀썩 앉았다.

“그럼 무슨 선물이 좋을까.”

낮은 탁상에 놓인 무드 등과 끝없이 내리는 눈만이 희미하게 빛나는 밤이었다. 퀸사이즈쯤 되니 성인 남성 둘이 드러누워 있어도 손끝이나 겨우 닿는 정도. 모노클까지 뺀 시야에 노아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한 달을 손꼽아가며 고를 정도는 아닌데.”

어차피 애초에 우리의 탄생을 축복하지 않은 자는 마법사 사회에 없을 텐데. 왜냐면 우리가 결국…하나로 남아서…일축을 당하고…뭐 대충 그런 식으로 세계를 구할 거였으니까. 우리 의견은 하나도 안 들어가 있지만 그럴 거라고 모두가 기대하고 있으니까. 언제 태어났는지는 다만 중요하지 않고 그저 태어났다는 사실만이 위안을 가져다주는. 우리가 그런 존재가 아니었나. (노아가 ‘영웅’이라는 칭호를 기꺼워하는 것과 별개로.) 글쎄, 생일이라니. 그런 새삼스러운 일을 신경 쓸 날이 오다니.

그러나 무슨 생각이나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노아는 단순히 친구를 위한 선물을 고른다는 일 자체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냥…천천히 생각해봐요. 재촉하는 거 아니니까…….”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점차로 잦아드는 가운데, 정자세로 누운 에녹은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팔월이 끝날 무렵까지 살아있기는 할까?

7.
체크아웃하는 동안 노아는 가판대에 아무렇게나 꽂힌 신문을 뽑아 들고 값을 치렀다. 직원은 에녹 옆에 갑작스레 생겨 신문을 읽는 일행에 관해 묻지 않았다. 어쩌면 관심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하긴 타인을 신중하게 들여다보기에는 세상이 너무 가난해져 버렸다.

“여기 신문은 5면부터 벌써 부고예요.”
“별수 있겠어요, 신문사라고. 그래서 나머지 4면에 읽을거리는 좀 있어요?”
“음, 아니. 대단한 건 없네요.”

바깥으로 나와봤자 거리와 휑한 호텔 복도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눈길 위로는 발자국조차 없어 꼭 아득한 옛날에 일찌감치 몰락한 고대의 도시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희망을 진작에 놓아버려 휘도는 쓸쓸함. 그것이 거리에 있었다. 단지 분위기로만 돌 뿐 아니라 꼭 물성을 가져 손에 만져질 것처럼 생생하게.
노아는 신문을 사 분의 일로 접고는 부고면을 제외한 기사를 하나하나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에녹은…고요하게 선 채 거리를 응시했다. 어쩌면 거리가 아니라 눈이 날리는 모양을 보는 걸지도 몰랐다.

8.
“에녹, 그런데 왜 서 있기만 해요? 돌아다닐 계획이라고 했으면서.”
“…눈 때문에 앞이 안 보여서요.”
“……진짜네, 눈 엄청 많이 온다. 좀 들어가 있을까요?”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노아는 재촉하는 대신 신문에서 눈을 뗀 그대로 에녹이 보는 방향으로 눈을 굴렸다. 붉은 벽돌의 거리는 흰 눈에 풍화되듯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폭설. 그래도 영하로 내려가지는 않는 날씨. 길을 메운 벽돌들 사이로 핀 보라색 여름꽃. 에녹의 머리칼과 모노클 안쪽의 빛이 바랜 왼눈. 머리는 원체 밝은색이라 티가 나지 않았지만, 짙은 색깔의 코트 위로는 눈이 점점이 쌓여갔다. 그러고 나니 꼭 눈보라 안에서만 나타난다는 괴담 속 유령처럼 보였다. 한 장소에만 붙박여 가끔 사람을 놀라게 하고 사라진다는. 그럼 나도 옆에서 같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 유령 2의 역할인가? 노아는 짧게 의문했다.

틀린 생각은 아닐 거다. 왜냐면 머글들에게 있어 세상을 구제할 기적의 마법사 따위는 허상처럼 느껴질 테니까. 이를테면 우린…… 산타 할아버지 같은 거다. 대뜸 나타나서 간절히 바라던 선물을 다정하게 머리맡에 쥐여주고 영영 떠나버리는. ‘기적이 있지 않고서야 인간을 구제할 방법은 없다.’ 책도, 라디오도, 뉴스도 모두가 그런 소리를 했어. 즉,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머글들 관점에서는. 왜냐면 지구를 이루는 대부분의 사람은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드문드문 내리는 눈 사이로 안개가 끼었다. 기온과 상태의 괴리 탓인지, 기이할 만큼 허공이 뿌옇고 짙었다. 불투명한 공중에 횡단보도의 초록 불이 깜빡였다. 도시는 고요로 가득했다. 아니 가득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텅 비어서 거기 다만 정적이 남아있는 것에 가까웠다. 노아는 접은 채 읽던 신문을 가방 안으로 대강 쑤셔 넣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입을 열자 목소리 대신 흰 입김이 퍼졌다.

9.
그럼 ‘우리’는 무엇이지? 있지, 우린 결국 뭘까? 하나를 위한 우리. 모두를 위한 하나. 그 모두에 ‘우리’는 포함이 안 되나?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불려야 옳지? 페레즈에도 끼지 않지만 머글에도 포함된 적 없는 노아는 어디로 가야 하지? 노아 페레즈는 천성적으로 소속감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가끔 의문한다.

눈이 쌓이지 않는다. 수북하게 쌓일 정도의 온도가 아니라서. 아주 얇고 새하얀 막 한 겹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녹았다. 다 녹았어. 앞으로 내릴 눈도 다 그렇게 될 거야. 제때 내린 눈이 아니니까. 겨울에 눈이 오던 시대에 내리는 눈이 아니니까. 노아는 문득 에녹의 어깨를 흔들어 무언갈 말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인파가 빠지고 난 이 허한 빈 자리에 너와 나만이 남았다고. 우리만이 이 빈 곳에 정적처럼 남아 있다고.

10.
즉 현시점에서 인간에게 닥친 재난을 막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의 얕은 지식이 최선일 것이라 착각했다. 이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기적을 빌어야 하나, 이제껏 우리가 '기적'이라 불렀던 것들은 모두 자연의 힘이었으므로 이젠 누구의 조력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이 텅 빈 자리에 무엇이 들어오게 될까?
생명이 회복하는 데에만 족히 오백 년 이상은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 아득한 세월 동안 우리가 열어젖혀 버린 이 거대한 판도라의 상자는 과연 무엇을 품게 될까. 분명 인류는 아닐 것이다. 인류는 아닐 텐데, 그렇다면 무엇이?
-제임스 허머트, 〈고립이 임한 자리〉,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