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O DEFECTIO
@삼번국도

1.
인간은 놔두면 언젠가 배신을 한다. 스물넷은 그걸 깨닫기에는 충분한 나이였다. 호모 사피엔스? 다 개 같은 소리다. 인간에게 따라붙을 수식어는 배신하는 사람 정도는 되어야 본질에 가깝다. 주위의 모든 생각하는 자들은 배신과 음모만을 생각했으므로. 부모, 성당, 조직. 에녹은 머릿속으로 등 돌린 자들의 머릿수를 셈하다가 그만두었다. 두통 탓이었다. 에어백에 제대로 처맞은 이마께가 지끈거렸다. 보복 운전의 대가는 쓰라렸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쓰라린 게 기다리고 있었다. 현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목소리와 함께 파도를 일으켰다.

“일어났으면 일어났다고 말을 해줘야죠.”

밝은 조명 밑에서 본 피부는 흠집 하나 없이 매끈하고 희었다. 굳이 손댈 것 없이도 느껴지는, 제 얼굴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붙은 밴드와 헝겊의 물성과는 명백히 반대였다. 에녹이 입을 다물자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는 재촉하지 않았다.

“충격적이겠지. 이해해요. 진정될 때까지 굳이 자극하지 않을게요.”
“뭘 이해하는데요.”

반문에 이어지는 답은 없었다.
낮은 목소리가 끊긴 뒤에는 환청처럼 총성과 비명이 계속되었다. 어쩌면 환청이 아닐지도 몰랐다. 에녹이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 전, 그의 이름을 다급하게 외치던 너머의 목소리들이 있었고 어깨를 잡아 흔드는 손길이 있었다. 그들이 지금까지도 에녹을, 에녹과 함께 쓰러졌던 다른 동료들을 위해 싸우고 있을지도 몰랐다. 신이시여.

“그런데 에녹.”

저 남자는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나를 몰라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알아요?”

그 질문 직후, 에녹의 기억이 수마 속에서 몸을 뒤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랬다.
뒤늦게 깨닫는다. 질문은 '내가 너를 어떻게 아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너를 잊었겠냐'여야 했다. 등을 곧게 핀 채 무채색의 매트리스 머리맡에 앉은 저 남자. 흰 눈 사이로 유채꽃과 함께 태어난 것만 같은 저 남자. 저 남자를 에녹은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우선순위의 조정을 거쳐 마음 한구석에 버려두었을 뿐. 평생의 삼 분의 일쯤을 저 남자를 용서하게 해달라 기도하지 않았던가. 동시에 에녹은 알았다. 신이 단 한 번도 인간이 욕망하는 방향으로 길을 터준 적이 없다는 걸. 에녹은 제게로 열린 길을 응시했다. 도로시가 걸었을 법한 저 노란 길을. 그리고 그 눈부신 오솔길은 에메랄드 성 대신 과거로 연결된다.

아, 그때는 좋았지. 세상이 말랑말랑한 이분법으로 이뤄져 있다고 믿었던 그 시절. 에녹은 처음으로 노아 페레즈를 만났다. 아니 노아 페레즈도 아니었지. 성조차도 없이 그저 노아. 짙은 남색과 검은색만으로 이루어진 교복을 차려입은 아이들의 행렬 속에서 보색의 노아는 독보적이었다. 우선 성당을 거쳐 입학한 학생이 아니었고, 이어지는 행동거지도 그랬다. 이탈리아 억양 사이에서 그만이 '온전한' 미국인의 영어를 구사했다. 아침에 단정하던 교복은 점심이 되면 매무새가 흐트러졌다. 제 몸집만 한 들개를 목전에 두고 손을 내밀기도 했으며 성당에서 귀신을 봤다고 떠들어대는 주범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회상이 도대체 지금 상황의 어디에 도움이 된단 말인가? 에녹은 고개를 저었다. 노아는 그러는 동안에도 돌려 말한 '모른다'는 대답이 적잖이 충격이었는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 치들이 당신을 항쟁에 투입했으면서 내 얼굴도 안 보여줬다 이건가요? 그건 그거대로 충격인걸.”
“허튼소리 말고, 나 왜 여기 있어요?”
“왜겠어요?”

노아는 다리를 꼬았다. 입꼬리를 올리자 굴곡 하나 없어 보이던 눈가에 애교살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는 시간이 아주 많아 보였고, 그 시간 전부를 에녹에게 투자할 용의도 있어 보였다.

“당신의 ‘가족’이 당신을 버렸어요.”
“….”
“그리고 나는 버려진 에녹을 주워온 거구요.”
“개소리는 다 했어요?”
“아, 이거 너무하네. 저기, 그 에어백 터진 벤츠에 당신을 놔두고 갔으면 에녹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예요. 알아요?”

말끝에 노아는 목 가운데에 선을 긋는 제스처와 함께 혀를 한 번 찼다. 넓은 방에 퍼지는 딱, 하는 맑은 소리. 에녹이 아무 반응이 없자 그만 머쓱하게 웃고 만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어요. 왜냐면 내가 당신을…이렇게 거둬왔고, 이제 나랑 같이 일할 거니까.”
“….”
“자, 일단 밥부터 먹을까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분명 배가 고파서 신경이 예민해진 거겠지. 괜찮아질 거예요. 뭐든 다.”

2.
뭐든 다 괜찮아질 거라고.
그 막연한 생각만으로 에녹의 조부는 살인 혐의를 피해 스물넷에 뉴욕으로 이주했다. 소피아 로렌이 할리우드의 보석이 되어 이탈리아의 아메리칸 드림을 부추길 무렵이었다. 그는 맨해튼 부근을 헤매다가 이윽고 리틀 이탈리아에 완전히 정착했다. 그즈음의 뉴욕은 부동산 붕괴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지 이십 년이 지나 있었다. 그는 거기서 여러 장사를 거치며 명민한 머리로 번번이 성공을 거두었고 마침내 위조지폐와 총기에 손을 댔다. 수많은 물품을 수입하던 그로서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는 자꾸만 부유해졌고 함께 사업을 하던 동료의 여동생과 결혼해 아들을 가졌다.
그리고 그 아들이 곧 에녹의 아버지가 됐다.

낳기는 했지만 길러주지는 않은 아버지. 에녹은 아버지에 대해선 잘 몰랐다. 할아버지가 부러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놈은 어려서부터 책임감이 없고 겁은 많았어. 사나이답지 못했지.” 그 대신 알려준 할아버지의 영웅사가 에녹의 계보 한쪽에 걸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느 패밀리에 속한 적이 없었고 어느 뿌리도 가지지 못했다. 그의 가족은 살인을 하고 타국으로 도망친 아들을 돌아오지 않을 탕아처럼 떠나보냈다. 그는 소속을 욕망하고도 사람을 죽일 정도의 만용은 갖지 못했고 평생 조직의 변두리를 떠돌았다. 아들을 낳고 결혼시키기까지 했지만, 아들 부부가 리틀 이탈리아를 떠남으로써 그의 청사진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늘그막에 조부의 손에 남은 거라곤 피폐로 일군 풍요와 에녹뿐이었다.
그러므로 아마 선의였으리라. 리틀 이탈리아의 '뒷사업'과 직결되는 성당에 에녹을 주기적으로 보냈던 것은. 그리고 그 성당이 경영권의 일부를 가진 천주교계 에스컬레이터식 기숙 학교에 에녹을 입학시켰던 것은. 가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지. 신이라는 이름의 실에 줄줄이 꿰인 퀼트가 될 뿐이더라도. 그러나 어떤 의미로는 디아스포라를 정의내리지 못하는 1세대 이민자의 비극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에녹은 겉면으로는 엄숙하고 웅장한 학교에 쉽게 녹아들었다. 그 성당에 다니던 또래 애 대부분은 당연한 수순처럼 거길 입학했다. 도심과 가까운 위치면서 동시에 울창한 숲을 보존 시켜 꼭 속세로부터 단절된 것만 같은 그곳이, 어린 에녹은 좋았다. 단정하고 각 잡힌 교복도 나쁘지 않았고, 교정을 은은하게 울리는 찬송가도 기꺼웠으며, 복도를 가로지르는 신부님들의 인자한 미소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말하면 노아가 어떻게 했더라, 아, 웃어주었지. 나도 여기가 좋아요. 속삭여줬었지.

노아는 내밀한 이야기는 쉽게 하지 않았지만, 말은 많았다. 주로 학교의 괴담과 얽힌 자신의 모험담이었다. 그런 면이 일견 할아버지를 연상케 하기도 해서 에녹은 늘 참을성 있게 노아의 얘길 들어주었다. 그러면 노아는 또 신이 나서 제가 아는 여러 가지 모험 소설의 줄거리를 읊어주었다. 에녹은 그 시절을 여름 한 시절의 단편적인 풍경으로 기억한다. 반바지 아래로 튀어나온 무릎을 간질이는 노아의 긴 머리칼, 햇살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나던 노란 눈, 목덜미에 찍힌 두 개의 점. 에녹의 허벅지를 베고 자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학교 뒤편 바닥에 드러누울 수 있는 사람은 노아뿐이었다. 열한 살의 어린 날로부터 시작해 에녹이 졸업할 때까지도.

3.
그리고 그 남자는 지금 에녹의 앞에 창백한 낯으로 서 있었다.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손에 돋은 힘줄이 선명했다. 사용인이 수프를 엎은 이불을 가지고 바삐 방을 나서자 거칠게 문이 닫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잠옷에 묻지는 않았다. 에녹은 의도적으로 눈을 굴려 시선을 피했다. 단식을 감행한 지도 삼 주가 가까웠다. 반대로, 에녹의 '가족'이 에녹을 되찾으려고 시도하지 않은 채로 삼 주가 가까웠다는 뜻으로도 읽혔다.

“왜 이렇게 거칠게 구실까.”
“어떤 개수작을 부리든 간에 안 통해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개수작이라뇨.”

바닥에는 사용인이 미처 닦지 못하고 나간 수프가 카펫을 적신 채 식어가는 중이었다. 노아는 한숨을 쉬었지만, 체념은 하지 않았다.
방은 화려했다. 창문은 크고 커튼에 수 놓인 문양은 기하학적이었으며 가구는 죄다 거대하고 묵직한 형상이었다. 막상 옷장을 열면 안은 휑했고 책상이며 삼단 서랍도 마찬가지라서, 생활감이 있는 것은 침대뿐이었지만 명실공히 방의 주인을 여기 쐐기 박으려는 의도가 드러났다.
그러나 점차로 채워지는 공간과 반대로 에녹은 천천히 말라갔다. 원래도 가늘던 팔목은 뼈대에 거죽만 거의 붙인 형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초대받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납치되어 온 듯한 분위기엔 변함이 없었다. 노아는 늘 거기에 있던 침대 머리맡의 의자를 끌어 앉아 떨어진 숟가락을 주웠다.

“이 꼴이니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대답도 여전하겠고요.”
“…….”
“예, 내가 졌어요.”

생각보다 순순히 나오는 패배 선언에 에녹이 눈을 끔벅이자 스푼을 쥔 노아 옆으로 문이 빠끔히 열렸다. 카트와 사용인의 몸 일부가 비쳤다. 흰 수프가 담긴 그릇. 스푼과 수프가 물물교환처럼 오갔다. 에녹의 낯이 대번에 일그러지는 형태를 주시하다가 노아는 새로이 받아든 숟가락으로 수프를 떴다. 미리 식혀두었는지 김이 오르지 않았다.

“의사가 조언해줬어요. 이쯤 지나면 장기에 손상이 갈 거라고. 에녹이 그러고 있으니 도저히 태연히 있을 수가 없네요.”
“노아 페레즈….”

에녹의 턱이 붙잡혔다. 다가온 노아의 표정은 기이하게도 슬픈 것도 같았고 기쁜 것도 같았는데 바로 그 점이 에녹을 혼란스럽게 했다. 왜 당신이. 왜 네가. 나의 국경을 끝없이 침범하고 구둣발로 짓이긴 사람은 너면서. 늘 너였으면서. “그러지 말아요.” 노아는 생각보다 훨씬 더 힘이 셌다. 자해와 같은 기아의 나날은 결론적으로는 저항할 힘을 빼앗아 가버렸다. 입을 벌리려 드는 엄지를 깨물자 짐승이 위협하는 듯한 낮은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목구멍에 흘러들어오는 수프를 맥없이 캑캑대며 받아먹는 수밖엔 없었다. 그나마 이 방에 다른 사람을 더 들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턱에 묻은 수프를 손으로 닦아주며, 이탈리아 브랜드의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는 백일몽처럼 이어서 속삭였다.

“옛날엔 노아라고 불러주었으면서.”

4.
그러고도 세 달이 더 꼬박 지난 다음에야 ‘성당’은 노아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노아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에녹에게 숨기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노아가 원하던 남자는 죽어가는 중이었다. 그것도 가느다랗고 희미한 희망 아래서.
면도날을 숨기고 들어갔던 욕조는 투명한 유리 부스가 됐고 샤워기는 천장에 붙은 형태로 시공 됐다. 옷장은 원한 적도 없던 비스포크 정장과 스포츠 웨어와 캐주얼한 옷으로 채워졌다. 물론 네 달이 지나도록 에녹은 잠옷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주머니와 끈이 있는 옷은 근처에도 놓지 못하게 했다. 동시에 에녹이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지문 하나 묻지 않은 유리 케이스에 담아 목전에 디밀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관점에서 보자면 맞추기 까다로운 고객이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율’의 일자와 장소를 정했다는 전언에 에녹은 기적처럼 마음가짐을 고쳐먹었다. 자해를 그만두었고 음식을 먹었으며 가끔은 운동도 했다. 운동을 하는 두 시간 동안 노아가 곁에 있다가 끝나자마자 부하를 불러 기구를 치우게 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거의 ‘진짜’ 생활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생활이라는 게 뭐지. 호텔로 가는 길, 차에 오르며 에녹은 문득 의문했다.
그런 게 내게 있긴 했나.

객실까지 에녹을 데려다준, 노아는 반면 그때까지도 여태 여유로운 낯이었다. 노골적으로 제품에 들어오라 설득하던 상대가 이제 자기 둥지로 돌아간다는데도 일말의 동요조차 없어 보였다. 외려 능청스러웠다.

“에녹. 지금이라도 나랑 도망치고 싶다고 얘기하면 나는 당장 차를 끌고 뉴올리언스까지 갈 수도 있어요.”
“…….”
“나랑 도망갈래요?”
“천국은 도망 길로는 갈 수 없어요.”

대답에도 노아는 상처받은 구석 없이 웃었다.

“오, 그것도 성경에 쓰여있던가요?”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볼일 보러 가세요. 내 가족이 당신을 기다릴 테니.”
“과연 그럴지.”

강경한 대답 아래에는 쪽지의 존재가 숨겨져 있었다. 들킬 리는 없었지만, 만에 하나 보이기라도 했다가는 마지막 기회까지 날아갈 터였다. 꼭 눈앞의 저 남자가 제 마음마저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주머니 안에 숨겨둔 쪽지를 꺼내 보이며 웃지나 않을까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에녹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춘 노아가 발길을 돌리자 일행은 셋을 제외하고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제야 에녹은 한 번 숨을 크게 내쉬었다.

5.
맨해튼의 풍경이 통유리로 이루어진 벽 아래로 펼쳐졌다. 지내던 저택은 페레즈의 별장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하긴, 뉴올리언스에서 맨해튼까지는 차로 이십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에녹은 침대에 모로 누워 주먹을 폈다. 사각형으로 자를 틈도 없었는지 거칠게 찢긴 흔적이 적나라한 싯누런 쪽지. 거기에는 휘갈겨 쓴 필체로 숫자가 쓰여 있었다. 2305. 아무런 단서도 없었지만, 에녹은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는 타임스 스퀘어 근처에 있는 호텔로 설정된 상태였다. 노아 페레즈가, 에녹을 대동하고.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노아를 생각하면 입안이 썼다. 재와 불의 맛이었다. 그걸 잊을 수는 없으리라. 노아 페레즈, 너는 모르겠지 내가 얼마나 너를…용서하게 해달라고 나의 신에게 빌었는지. 너는 불씨를 갖고 들어와 나의 성당을 불태웠지만 나는 너를 용서하고 싶었어. 세공된 보석 같던 눈을, 흐트러지던 흰 앞머리를, 가늘고 섬세한 손마디를 생각할 때마다 죄짓는 기분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에녹은 양손을 깍지 껴 잡고는 고개 숙인 채로 눈을 감았다. 누워있지만 않았다면, 영락없는 기도자의 꼴이었다.

직사각형의 형태로 아름답게 직조된 뉴욕의 한구석엔 화재가 일었던 적이 있었다. 4년 전 일이었다. 도심에서 난 불이라 쉽게 진압됐으나 기이하게도 딱 하나의 건물만이 처참한 형태로 불탔다. 한때 마피아와 연루된 사건으로 교황의 입에까지 짧게 오르내렸던 천주교계 학교였다. 인명 피해도 있었지만, 공식적인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사망자 하나 나오지 않은 사건을 기억하기에 뉴욕은 너무 분주한 도시였다.

그러므로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 이야기는 에녹의 몫이었다.

소방차와 경찰차 이전에 벤츠와 쿠페와 리무진이 있었고, 서류를 옮기는 바쁜 움직임이 있었다. 세인트의 이름을 단 그 학교는 정치 자금과 비리와 내부 분란까지 조장할만한 보고서가 잠든 장소였으므로 당연히 공무원의 눈을 피해야만 했다. 심지어 ‘그것들’은 이전에도 딱 한 번 털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보스는 신경질적으로 사람을 불러모아 타오르는 건물 안으로 처넣었다. 무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아는 사람의 팔다리가 타들었다. 약점을 잡힐까 두려워 불법 의사를 불러 치료시킨 뒤 쏴 죽였다. 그게 유일하게 사지 멀쩡히 걸어 나온 에녹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이미 패밀리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거나 다름없었다. 겨우 뒷세계 의사 따위가 두려워 죽일 생각을 한 시점에서부터. 그렇다고 해서 에녹이 명령을 저항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매번 동료를 치료해준 손을 부러뜨리고 대가리에 구멍을 냈다. 그러고 나면 패밀리와 관련되지 않은 성당을 가서 아침부터 고해를 했다. 떨리는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인 채로 죄를 지었다고 했다. 죽을죄를 지었다고 했다. 죽어도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고 했다. 그러면 신부님은 다정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죄의 세목을 말씀해주지 않으시면 고해를 해드릴 수 없습니다. 정확히 무엇을, 몇 번 했습니까?”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믿고 싶다. 그 어떤 속임수 없이 말하고 싶다. 열망처럼 에녹은 몸을 바로 세워 일으킨 뒤 몸을 풀었다.

6.
여태 유순한 체하느라 노아는 몰랐겠지만, 에녹의 구두는 빠르게 두 번 발 뒤꿈치를 굴러야만 공격성을 드러내는 종류의 무기였다. 보통의 방식으로는 칼날을 꺼낼 수 없었다.
나서기 전, 카펫 위에서 발을 구르자 날카롭게 벼려진 날이 험악하게 튀어나왔다. 맨해튼의 그 저택에서 한차례 소란을 일으켰던 손목은 아직도 말을 잘 듣지 않았지만, 발목은 아니었다. 만족스러웠다. 치명적일 수는 없을 테지만 발을 묶어두는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살인은 괴로웠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희생당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에녹은 이미 지나치게 닳았고 지쳤다. 다른 누구도 아닌 노아 페레즈에 의해 가장 크게 깎여나갔다.

호텔 문을 열자 주변은 기이하게 조용했다. 날을 꺼낼 준비를 하던 발이 그대로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고개 숙일 필요 없이 거대한 장정 셋이 흉한 꼴로 주저앉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숨은 쉬어도 의식이 없었다. 2305. 다시 숫자를 읊조리자 심장이 긴박하게 뛰었다. ‘가족’의 선물이 분명했다. 에녹의 패밀리는 이번 협상을 위해 호텔을 통째로 빌렸다고 했다. 아마 이들을 누가 발견하고 사태가 심각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에녹만 조용히 한다면.
엘리베이터는 먼 데 있지 않았다. 상승 버튼을 누르고 초조하게 손톱을 씹는 동안, 누구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는 직원이 타고 있었으나 그가 에녹을 알아볼 리는 만무했다. 23층을 누른 뒤부터는 숨조차 거의 쉬지 않았던 것 같다. 21층에서 직원이 내렸고, 그다음은 에녹의 차례였다. 쪽지는 볼 필요도 없었다. 다섯 번째 방. 그것의 문은 조심스레 열려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칠 정도였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가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오직 사람만이 기대를 한다. 에녹은 아주 오랜만에 스스로가 사람처럼 느껴졌다.

방안은 어두웠으나 노아가 있던 객실과 같은 구조라 통유리 너머로 햇빛이 비쳐 들어왔다. 불을 켜지 않은 방은 이상하게 궁핍해 보였다. 새까만 수단을 차려입은 백발의 남성은 의자에 앉아 성경을 든 채로 에녹에게 시선을 돌렸다. 에녹은 그를 알아보았다.

“선생님…….”
“쉿, 조용히 하세요. 문은 열린 채 두도록 하시고요.”
“…왜….”
“동료들이 올 겁니다.”

에녹의 질문은 ‘왜 이제야 왔느냐’였는데 신부는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그간 고생했습니다, 에녹. 들었어요. 단식도 했고 자살 시도까지 감행했다고요. 우리는 우리대로 에녹을 위해 큰 노력을 했지만, 항쟁으로 잃은 인원이 너무 많았습니다. 지원도 넣어봤지만, 노아 페레즈를 의식해서인지 누구도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어요.”

진중하고 다정한 목소리. 그러나 노아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선생은 다가가 성경을 건넸다. 이상했다. 성경을 달달 외울 만큼 들고다닌 에녹의 손에 그건 도무지 성경 하나만의 무게가 아니었다. 가까이서 본 신부의 눈은 흰자위가 지나치게 넓어서 약을 했거나 그 비슷한 종류의 범죄를 각오한 사람처럼 보였다. 수단과는 어울리지 않은 낯이었다.

“총입니다. 두 개의 탄이 들어가 있고요.”
“….”
“당신의 신실함을 증명하세요.”
“…시, 싫어요.”

에녹에게 성경을 넘겨주고 어깨를 그러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얼굴을 찌푸렸지만, 신부의 눈엔 그런 사사로운 변화가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싫다고요? 먹여주고 길러주고 가르쳤더니.”
“아픕니다. 놔주세요.”
“부모도 찾아오지 않는 짐승을 거두어 인간으로 가르쳤더니 결과가 이거냐?”
“싫다니까요! 선생님…저는….”
“배신자 놈! 학교에서부터 모두가 알았어. 모른 척해준 것뿐이지. 네가 이럴 줄 알았다면 페레즈의 새끼와 시시덕대던 그 얼굴에 미리 총구멍을 뚫어뒀어야 했는데!”
“….”
“그래, 이젠 ‘가족’을 위해 죽지도 못하겠다? 그렇다면 일을 처리해야지. 신께서 정하신 대로!”

빛을 등지고도 번뜩이는 늙은 얼굴을 에녹은 멍하니 보았다. 힘이 거의 풀린 손으로부터 성경이 다시 낚아 채였다. 신부는 빠르게 성경을 찢고 헤집어 권총을 꺼냈다. 정확히 그 형태를 따라 잘린 성경의 페이지들이 발치에 나뒹굴었다. 그가 한때 기도했던 바로 그 구절들이다. 두드리면 응답하리라고 맹세해주었던 그 문장들이다. 에녹은 끝없이 두드렸다. 손이 뭉그러질 때까지 기도했다. 그래서 돌아온 게 뭐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권총이 장전되는 특유의 무기질적인 기계음. 총을 쥔 신부의 손이 올라왔다. “마지막으로 인사는 해야겠구나. 잘 가려무나.” 다정한 작별. 에녹은 머릿속으로 등 돌린 자들의 머릿수를 셈하다가 그만두었다. 두통 탓이었다. 그래, 에어백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인제 그만둘 때가 됐다. 이건 다 그냥…사람 때문이다. 그놈의 빌어먹을 호모 사피엔스가 끝없이 에녹을 괴롭힌다. 차라리 짐승이었다면 좋았을걸. 인간이 아니었다면 좋았을걸. 원죄 따위는 갖지도 않았더라면.

7.
굉음이 울렸다. 하지만 총알은 빗나갔다. 그 거리에서는 실수할 수가 없었는데. 에녹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신부의 팔은 얼굴로부터 한참 비껴가 있었다. 고의가 분명했고, 총을 쏘려고 했지만 쏘지 못한 모양이었다. 왜? 관습적인 살인에 공허하던 표정엔 밀물처럼 두려움이 차올랐다. 오른쪽 어깨를 덮은 수단의 짧은 케이프 끝자락에 무언가 점차 묻어났다. 대번에 깨달았다. 저것은 피다. 신부가 쥐고 있던 총이 떨어지자 명령처럼 등 뒤에서 목소리가 떨어졌다. 어깨를 잡아끄는 여유로운 손길과 함께.


“물러서야지.”
“노아, ….”

뒷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노아가 가진 총이 세 번 더 크게 떨었다. 왼쪽 어깨, 명치, 명치. 신부는 목 안쪽을 긁는 듯이 흉한 소리를 내다 그대로 멎었다.

“이럴 줄 알았어요. 협상은 결국 협상이 아니었고 말을 질질 끄는 구차한 수법에 불과하더군요. 굳이 호텔을 통째로 빌리고 직원들을 통제한 데에도 이유가 있었네요.”
“….”
“어쩌다 신을 그렇게 사랑하게 됐어요?”

에녹은 입을 다문 채 주먹을 쥐었다. 오래 깎지 않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갔다. 바깥에서는 누군가 뛰어다니는 소리가 분주했다. 불이 꺼진 객실 안은 흉부를 벌떡대며 죽어가는 시체 한 구를 제외하면 모든 게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어쩌다 아무것도 쥐지 않으려는 손바닥 위로 뛰어들기를 청했냐구요.”

그리고 노아는 에녹의 손을 다정하게 폈다. 검지와 중지를 교차해가며 인형 놀이 하듯 손바닥을 매끄럽게 가로질렀다. 화약의 냄새가 짙었으나 그는 뻔뻔하게도 고아를 위해 동화를 구연해주는 봉사자를 흉내 냈다. 귓가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손끝이 주저흔이 남은 손목과 겹친다.

“나라면 에녹을 쥘 거예요. 에녹이 나에게 그걸 허락하기만 한다면.”

지극히 낮은 위치의 표현을 썼지만, 태도는 명백하게 오만했다. 처지를 생각하면 지나친 처사는 아니었다. 노아의 손이 에녹의 손을 덮은 형태임에도 에녹은 마치 노아가 제게 손을 내민 것만 같은 가벼운 착란에 빠졌다. 그리고 사실 그 감각은 착각이 아니라 육감에 가까웠다. 노아는 분명히 에녹에게 손을 내밀었으므로, 잡기를 기다리는 상태. 말마따나 에녹이 자신을 쥐기를 기다린다. 신이 아닌 인간이, 자꾸만 무얼 쥐려다 상처가 나고 만 그 손이. 배반하고 쟁취하기를.
여느 신을 믿고 따른 자들이 하나같이 그랬듯이.

8.
노아 페레즈에게는 힘이 있다. 알 카포네가 신선한 우유를 팔아 돈을 벌었듯이 그는 신선한 오렌지와 레몬을, 헤로인을, 불법 개조 총기를, 사람을 팔아 돈을 벌었다. 정확히는 그래야만 하는 상황을 유연하게 순응해왔다. 신과는 다르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고 우상 숭배하기를 금하고 몸에 못을 박고 죽어가기를 요구하는 자와는 다르다. 노아 페레즈는 에녹을…에녹의 죄를…끝없이 이유 없이 사할 것이다. 왜냐면 인간이니까.

노아의 별장으로 자진해 돌아온 에녹은 하루종일 잤고 매일 꿈을 꿨다. 그러는 동안은 ‘페레즈의 새끼와 시시덕대던’ 나날의 연속이었다.
페레즈는 천팔백팔십년에 뉴올리언스로 이주한 시칠리아의 패밀리였다. 소피아 로렌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고, 패밀리 간 힘겨루기가 그 목적이었다. 미국 땅에 발 디딘 순간부터 그들은 배신자를 드럼통에 넣어 태평양에 떠내려 보낼 준비가 되어있었으며 맥주 오프너로 다른 걸 따는 법을 알았다. 그런 자들이 하나뿐인 조직의 후계자를 리틀 이탈리아로 보낸 의도는 명백했다. 유학 같은 무해한 의도일 리가 없었다. 그들은 폰을 퀸으로 만들기 위해 적진의 가장 말랑한 구석을 찌른 거였다. 하지만 노아는 에녹에게는 늘 노아였다. 페레즈 없이는 설명되지 않던 그의 이름은 에녹에겐 언제나 두 음절이었다. 춥다고 하면 제 몫의 카디건을 덮어주고, 고맙다는 한마디에 생글생글 웃고, 졸업하기까지 구년을 꼬박 제 곁에서 지샌.

기숙사에서 그는 가끔 무구하게 흰 잠옷을 입은 채 에녹의 침대에 파고들었다. 맑게 빛나는 눈으로, “아까 낮에 본 괴물 동상 때문에 잠이 안 와요.” 말하며. 새삼 생각한다. 대체 그 많은 괴담은 학교의 어딜 돌아다니며 안 걸까? 어느 금고의 비밀번호를 풀며 생각해냈을까? 글쎄, 이제는 시효조차 지난 질문이다.

노아와 함께 잠드는 꿈을 꾸며 일어난 새벽, 에녹은 지나치게 큰 침대 시트에 웅크려 누운 채 생각했다. 노아가 여기 있으면 좋겠어. 노아라도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그는 몽유병 환자처럼 일어나 복도를 걸었다. 노아의 방은 먼 데 있지 않았다. 별장의 문은 죄 똑같았다. 그러나 에녹은 노아가 해주었던, 한때는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을 다 기억했으므로 헷갈리지 않았다. 알려준 대로 방문의 개수를 세고 방향을 더듬어 문을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이 되려던 찰나 문이 열렸다. 뭘 처리하다가 잠들었는지 구겨진 정장 차림으로 노아는 눈을 비볐다. 누가 봐도 문밖에 있는 사람이 에녹이리라 짐작한 듯이 풀어진 모양새였다.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안 잔 건 아니죠?”
“악몽을 꿨어요.”
“어, 저런.”
“…이 집의 동상이 돌아다니는 걸 봤거든요.”

필요한 것만을 모아둔 별장에 동상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건 뉴올리언스의 본가를 뒤져야 두 개 나올까 말까 했다. 의도는 분명했고, 노아 페레즈는 환하게 웃었다. 방문은 전에 없이 환하게 열렸다.

9.
어찌어찌 걸어 다니기는 했어도 에녹은 여전히 잠에 취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 질문을 다시 들었을 때 자신이 무어라 대답했는지, 나중에 가서는 기억을 못 했다. 다만 노아의 이름을 말했던 것 같았다.
후일 물어보아도 노아는 알려주지 않았다. 반은 장난기 탓이었다. 부러 입을 다문 얼굴에 약 올라 며칠을 매달렸지만 결국 에녹도 답을 받아내기를 포기했다. 제가 어떤 답을 했을지, 기억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였다.

10.
에녹은 뉴올리언스로 가지 않았다. 노아 역시 당연히 뉴욕을 떠나지 않았다. 애초부터 부모님의 사업을 계승 받는다는 명분으로 맨해튼을 갖기 위해 왔다고 했다.

방은 빠르게 채워졌다. 옷장엔 에녹이 본 적도 없는 옷들이 자꾸만 늘어갔는데 심지어 그것들 전부가 비스포크였다. 치수도 정확했다. 옷 사이즈를 적어 제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좀…징그럽다고도 생각했지만 지적하지 않았다. 책상 서랍에도 역시 다이어리며 지갑이며 상비용 구급약, 필통 따위가 점차 들어찼다. 그러나 거기에 십자가 그어진 물건이 들어오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이제 에녹은 노아를 용서하게 해달라고 빌지 않는다. 문은 이미 열린 지 오래다.

기억 속, 이불 안에서 잡았던 손은 따스하고 단단했다. 어릴 때의 부드럽던 촉감에 비하자면 생경했다. 노아 페레즈 앞에서, 에녹은 계시를 받은 자가 으레 그러하듯, 멎기로 마음먹었다. 있을 수 없는 변화를 거쳐 가는 과정. 기원부터 바뀌어 가는 듯한 마음. 세상에 단 두 개체뿐인 아종이 되어가는 기분. 그것을 느낀다. 신앙이라기엔 지나쳤고 사랑만으로는 부족했고 연인이라는 말조차 불만족스러웠다. 끝없이 지나치고 또 스쳐 가서 마침내 에녹은 두 사람을 정의한다. 호모 디펙티오. 배신하는 사람.